차례에 차가 빠지고 술이 올라간 이유

차례의 기원을 생각하며

by명욱
차례(茶禮)에 차(茶)가 사라진 이유

해마다 명절이 되면 대목을 맞는 시장이 있다. 한 때는 가문을 대표했던 음료, 이제는 이제는 각 지역과 농산물을 알려가는 전통주 시장이다.


명절 선물로도 많이 나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차례상의 술잔을 채우는 제주(祭酒)로서의 수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차례(茶禮)'라는 이름 어디에도 술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차를 올리는 예(禮)라는 이름의 의식에, 정작 차는 없고 술만 오른다. 대체 언제,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


추석의 유래

추석의 뿌리부터 짚어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라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서기 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이 도성의 여인들을 두 편으로 나눠 한 달간 길쌈 경연을 시켰고, 진 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해 이긴 편에 사례하며 노래하고 춤췄다. 이를 가배(嘉俳)라 했다. 여기서 한가위가 왔다고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조상도, 차도 없는 노동의 대가로 벌인 축제였다.


고려시대, 차의 등장

여기에 신라의 승려 충담사가 매년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렸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시작으로, 고려 왕실은 차 전용 관청까지 설치했다. 바로 다방(茶房)이다. 이곳에서 팔관회·연등회 같은 불교 국가행사와 왕실 조상 제사(왕묘제)에 차를 올리는 진다(進茶) 의식을 정교하게 갖췄다. '차례'라는 이름은 바로 이 차 올리는 예에서 나왔다.

조선의 숭유억불, 불교식 제사를 지워가다

그런데 조선이 들어서며 반전이 일어난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나라 조선에서, 차는 불교의 상징으로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에 불교 예식을 쓰지 말고 한결같이 성리학 주자가례를 따르라는 흐름이 자라고 있었다. 주자가례는 주자가 정리한 집안의 예법으로 사찰에서 승려가 주관해온 불교식 제례와 달리 자손이 직접 사당에서 조상을 모시는 의식이다.


그래서 주체부터가 다르다. 하나는 승려가, 하나는 자손 본인이 치른다. 성리학자들에게는 이 차이 자체가 문제였다. 조상의 제사를 남에게, 그것도 출가한 승려에게 맡긴다는 것 자체가,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선왕·선후를 굴욕되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고 이때 곧바로 차가 금지된 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례(茶禮)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기사가 2,065건에 이를 만큼, 왕실의 다례 전통은 한동안 여전히 뚜렷했고 그 방식도 외교, 관례, 조회 때 등장하는 등 차의 사용법은 다양했다.


다만 다례 또는 차례는 추석 때 올리는 행사는 아니었다. 보통 낮에 올리는 간단한 제사라는 의미로 주다례로 많이 쓰였다. 주다례란 왕이나 왕비의 장례 후 3년 안에 혼전(魂殿)과 능소(陵所)에서 낮에 드리는 제사인데, 차와 간단한 음식으로 정오에 지내며 주로 다탕(茶湯)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이 부분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진다.


하지만 불교식 제례는 중종 대에 정점을 찍는다. 중종 원년(1506) 신하들은 불교식 왕실 제사인 기신재(忌晨齋)를 폐지하자고 청하며 "선왕·선후를 굴욕되게 하는 것"이라 몰아붙였다. 결국 10년 뒤인 중종 11년(1516) 기신재는 공식적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차는 이 싸움의 주요 이슈는 아니었지만, 불교와 떼려야 뗄 수 없던 물건이었기에 이 흐름 속에서 함께 밀려났다.


여기에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도 불리했다. 차나무는 연평균 기온 13~14℃ 이상, 겨울 최저기온이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아열대성 작물이라, 한반도에서는 경남·전남 일부 남부 지역에서만 재배가 가능했다. 애초에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차 산업이 약해진 또 하나의 이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문화사』가 짚는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세금이다. 조선의 차는 공다(貢茶), 즉 조공으로 국가에 바치는 물품이었는데, 그 부담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22곳이던 작설차 산지는, 『여지도서』(1770)에 이르러 9곳으로 줄었다. 백성들이 세금을 피해 스스로 차나무를 없앤 결과였다. 왕실은 성리학적 명분으로 차를 밀어냈지만, 정작 차 산지 백성에게 부과된 조세는 관성적으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위에서는 이념이, 아래에서는 세금이,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결과를 향해 갔다.


또 하나 "임진왜란·병자호란 양난으로 남부의 다원(茶園)이 황폐해지고, 찻사발을 굽던 도공들이 일본으로 대거 끌려가면서 차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기반 자체가 무너져 술과 숭늉으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정유재란 시절에 왜군은 울산·순천 등 남해를 중심으로 한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약 1년여간 웅거했다.


술, 차 모두 올려도 된다

그렇다고 차와 술이 처음부터 양자택일의 관계였던 것도 아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차와 술은 한 상 위에 양립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이(李珥)의 수제자이자 조선 예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며 훗날 송시열(宋時烈)의 스승이 된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다. 그가 지은 『가례집람(家禮輯覽)』(1599년 저술, 1685년 간행)에 따르면, 매달 초하루·보름에 지내는 삭망차례에서 신주 오른쪽엔 술을, 왼쪽엔 차를 함께 올렸다.

5. 술만 올려도 된다


차없는 차례, 본격적으로 등장하다

이 차 없는 예법을 결정적으로 확정한 건 17세기 후반(1680)에 태어나 18세기에 걸쳐 활동한 학자 이재(李縡, 1680~1746)였다. 그는 관례·혼례·상례·제례 네 가지 예를 아우르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편찬하며 이렇게 못박았다. "차는 본래 중국에서 사용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가례』의 절차에 나와 있는 설다(設茶)·점다(點茶) 같은 글귀는 모두 빼어버렸다." 국가가 반포한 법전은 아니었지만, 이 바카라은 후손과 문하생들의 손을 거쳐 계속 재간행되며 사실상 조선의 표준 예법서가 됐다.


이 바카라이 결정적으로 퍼진 계기는 따로 있다. 18세기 이후 신분제가 흔들리며 부를 쌓은 평민들이 족보를 사고 양반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양반이 되려면 양반의 표식인 조상 제사를 갖춰야 했는데, 그 방법을 알려주는 가장 쉬운 매뉴얼이 바로 『사례편람』이었다. 원래 소수 사대부만 알던 정교한 예법이, 신분 상승의 열망을 타고 조선 전역 민중의 명절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조선 궁중에서 차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신을 맞이할 때, 왕의 생일을 기념할 때, 왕실이 사사로이 선왕의 초상 앞에서 정을 나눌 때 여전히 차가 음용됐다. 1829년 순조의 즉위 30년과 40세를 기념한 ‘기축년 진찬(己丑年進饌)’에서는 은주전자와 은찻잔에 담은 작설차를 왕에게 올리는 상이 연회 한복판에 차려졌고, 역대 왕의 어진(御眞·초상화)을 모신 사당인 선원전(璿源殿)에서는 선왕의 탄신일마다 술과 차를 함께 올리는 탄신다례(誕辰茶禮)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명맥만 이어갈 뿐, 민간에서는 술이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수난

그러나 나라를 잃은 뒤, 이 전통은 또 바뀌게 된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관혼상제 전반을 규정한 「의례준칙(儀禮準則)」을 반포했다. 상복을 입는 기간(복기)을 30일로 줄이고, 제사는 기제사와 묘제사 두 가지로만 한정했으며, 기제사도 2대까지만 지내도록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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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시절에 나온 의례준칙. 서두에 현재 조선의 의례는 미흡한 점이 많아서, 오랫동안 식자(識者)들도 그 정리·개선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그것을 정리한다고 말하고 있다.


학계는 이를 상제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민족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려 한 식민 정바카라의 하나로 본다. 다만 이 규정에는 강제력이 없었고, 실제로 잘 지켜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 민간에서는 의례준칙, 사례서, 축문집 등 관혼상제 매뉴얼이 대거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 『사례편람』 같은 전대의 예서를 발췌하고 손질한 것이었다. 위에서 간소화를 명령하는 동안, 아래에서는 옛 예서를 계속 베끼고 찍어내며 명맥을 이어간 것이다.


또 일제강점기 시절 지금 아는 차례상에 올라가는 음식 기준이 등장한다. 바로 어동육서,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등이다. 우리가 "전통 예법"이라고 당연히 여기는 이 규칙들은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세종실록오례』 등 어느 유교 경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주자가례』는 제사상에 올릴 음식 17가지 정도만 나열할 뿐, 구체적인 배치 방법은 아예 명시하지 않았다.


김시덕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연구원의 2016년 논문에 따르면, '홍동백서'라는 표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건 1926년 김동진이 쓴 『언문상례(諺文喪禮)다.

"실과상을 올리나니 홍색은 동편이오, 백색은 서편이오"라는 문장이 그 최초 기록이다. 즉 지금 우리가 "전통"이라 믿는 이 진설 규칙은, 정확히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나타나 이후 민간에 퍼진 근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image_readtop_2015_159129_14241153021770537.jpg어육동서, 홍동백서 등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나온 의례법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매일경제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법률로 제식절차가 정해진다. 1969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이다. 여기엔 술을 바치는 ‘헌작(獻酌)’이라는 순서가 정확히 기입돼 있다. 2021년 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에도 ‘헌주(獻酒): 술은 한 번 올린다’라고 그대로 남아 있다.


결국 차례와 제사상에 누가 올라가느냐를 놓고 벌어진차와 술의 대결은 대결은 국가 의례준칙에 ‘술’로 명시되며 지금에 이른다.


하지만 차와 술 중에서 무엇을 올리느냐가 그렇게 중요할까. 추석 차례의 본뜻은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한 감사다. 차와 술 논쟁보다는 어떻게 의미를 담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 검색결과 | 조선왕조실록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건전가정의례준칙

차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PS: 해당 글은 조선일보 명욱의 주키피디아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에 내용을 추가 보완한 것입니다. 참고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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