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레드 와인 산업이 흔들리는 이유
와인은 프랑스 그 자체였다. 국가의 상징이자 애국심의 대상, 프랑스라는 나라를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였다. 그런데 지금, 그 프랑스에서 와인이 팔리지 않는다. 정확히는 레드 와인이다.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은 버티거나 일부는 늘고 있는데, 유독 레드 와인만 소비가 크게 줄고 있다.
강해진 제도
너무 오래, 너무 당연하게 마셔온 술 199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인의 식탁에는 매일같이 저렴한 테이블 와인(Vin de Table)이 올라왔다. 그런데 이 '데일리 와인'이 가장 먼저 식탁에서 사라졌다. 소비자의 인식이 '양'에서 '질'로 옮겨간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건 제도였다. 1991년 제정된 '에뱅법(Loi Évin)'이 주류 광고와 판촉을 엄격하게 제한했고, 음주운전 단속까지 강화되면서 반주 문화 자체가 흔들렸다.
여기에 실용적인 이유도 있다.
마실 만한 와인은 한 병에 5유로는 줘야 하는데, 맥주는 1~2유로면 충분하다. 코르크를 열고, 남은 병을 보관하는 번거로움도 간편함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진입장벽이다. 백 년 전만 해도 술이라면 와인뿐이었지만, 지금은 맥주·칵테일·스파클링까지 선택지가 넘쳐난다는 것도 한몫한다.
식탁이 바뀌면서 술도 바뀌었다 가족 구조와 식사 문화의 변화도 결정적이다.
짧아진 점심시간
1990년대 후반부터 업무 효율이 강조되면서 점심시간이 짧아졌다. 샌드위치로 때우고 오후 업무를 위해 낮술을 피하는 게 당연해졌다. 대가족은 핵가족으로, 다시 1인 가구로 쪼개졌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매 끼니 와인 한 병을 여는 일은 번거롭다.
자연히 가볍게 마시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그 자리를 가장 먼저 차지한 게 맥주였다. 프랑스는 유독 음식과의 궁합을 따지는 나라인데, 묵직한 레드 와인은 그 궁합을 고민해야 하는 술이다. 반면 맥주나 화이트, 스파클링은 배달 음식이나 가벼운 안주에도 무난히 어울린다. 진입장벽 자체가 다른 셈이다.
젊은 세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떠나고 있었다
사실 젊은 세대의 와인 이탈은 50년 전부터 시작된 흐름이다. 다만 최근 20년, 특히 2010년대와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그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정부의 주류 규제와 보건 캠페인이 이어지는 사이, 시장에는 수제 맥주와 수제 증류주, RTD, 스파클링, 화이트 와인이 밀려들었다. 전통적인 레드 와인은 그 사이에서 점유율을 하나둘 내줬다.
와인이 프랑스의 정체성이 된 이유
와인이 국가 정체성이 된 이유 그런데 와인은 그냥 술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스스로를 '가톨릭의 수호자'라 자처해왔다. 프랑크 왕국의 페팽 3세가 교황에게 땅을 바치고, 군대 없는 교황을 여러 차례 지켜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유럽에서 수도원 세력이 가장 강했던 곳이 프랑스였고, 수도사들의 손에서 숱한 와인이 태어났다. 지금 프랑스 최대 산지인 보르도는 약 300년 동안 플랜태저넷 왕조, 즉 영국 왕실의 지배를 받으며 영국 왕실의 와인으로 선택되기도 했다.
결정적인 건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귀족과 교회, 수도원이 쥐고 있던 포도밭이 민간으로 넘어가며 와인은 비로소 대중의 술이 됐다. 19~20세기에는 군인들에게 와인이 정기 지급되면서 '민족의 술'이라는 위치가 굳어졌다. 종교와 혁명, 전쟁을 함께 지나온 술이니, 단순한 기호품일 리 없다.
다른 나라 전통의 술, 모두가 바뀌고 있어
그런데도 왜 흔들리는가 이 변화는 프랑스만의 일이 아니다. 독일은 맥주 점유율이 줄고 있고, 한국도 1970년대 탁·약주 시장을 압도했던 막걸리가 지금은 크게 줄었다. 우리도 소주와 맥주 외에 와인, 위스키, 하이볼까지 마시게 됐으니 같은 흐름이다. 다만 프랑스의 경우 이 변화가 최근 20~30년 사이 너무 급격하게 몰아쳤다는 게 문제다. 슬롯와 산업이 적응할 시간을 벌지 못한 채, 미국의 관세와 중국의 경기 침체까지 한꺼번에 겹쳤다.
포도밭을 갈아엎고, 술을 소독제로 만드는 나라 상황이 심각하다 보니 정부까지 나섰다. 전 세계적으로 포도 재배가 늘고 칠레 등 신대륙 와인이 가격 경쟁력으로 저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프랑스는 저가 와인 생산을 줄이고 고부가가치 와인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농가에 보조금을 주고 포도밭을 갈아엎게 하는 정바카라까지 나왔다.
더 놀라운 건 '긴급 증류 보조금' 제도다. 정부와 EU가 팔리지 않는 재고 와인을 사들여 화장품이나 손소독제에 쓰이는 공업용 알코올, 바이오에탄올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와인 가격 자체가 폭락할 수 있어서다. 다만 고급 와인은 여기 해당하지 않는다. 소독제가 되는 건 어디까지나 저가 와인들이다.
수출길은?
여기에 수출길마저 막혔다. 미국의 관세로 대서양 건너 시장이 좁아졌고, 중국은 경기 침체로 최근 몇 년 새 프랑스 와인 수입량을 큰 폭으로 줄였다. 내수도, 최대 수출국도 흔들리니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 하는 처지다.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위기는 유럽 전통 와인 생산국 전체가 겪는 구조적 현상이다. 스페인은 저가 벌크 와인 비중이 높아 직격탄을 맞았다.
포도나무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피스타치오나 아몬드를 심거나 태양광 부지로 바꾸는 농가가 늘고 있고, 심지어 스페인의 저가 와인이 프랑스로 흘러들어오자 프랑스 농민들이 트럭을 점거하고 와인을 방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탈리아 역시 내수 감소와 레드 와인 기피로 재고가 쌓이면서, 수확량 상한선을 낮추고 재고를 하위 등급으로 재분류해 저가에 파는 궁여지바카라을 쓰고 있다. 젊은 세대의 이탈,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폭염, 미국 관세, 중국 시장의 불황까지. 유럽 레드 와인 생산국들이 나란히 같은 삼중고, 사중고를 앓고 있는 셈이다.
살아남기 위한 두 갈래 길
그래서 프랑스 와인 산업은 지금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고가 와인은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 등으로 더 고급화하며 자산으로서의 가치를 굳히는 중이다. 반대로 저가 와인 시장은 판을 새로 짜고 있다. 무거운 추출 방식 대신 과실향 풍부한 가벼운 레드가 뜨고, 일부 생산자는 차갑게 식혀 마시는 '칠드 레드(Chilled Red)'를 식전주나 야외 행사용으로 내세워 단가를 올려 받는다.
남프랑스에서는 고지대 구역을 새로 발굴해 유기농·내추럴 와인 거점으로 전환하며 프리미엄 가치를 얹고, 원래는 품종을 밝히지 않던 전통을 깨고 신대륙처럼 '피노 누아', '샤르도네' 같은 품종명을 라벨 전면에 내세우는 곳도 늘고 있다.
수출 쪽에서는 인도가 새로운 활로로 떠올랐다. 2026년 1월, EU와 인도가 20년 가까이 끌어온 자유무역협정 협상을 마침내 타결지었다. 그동안 150%에 달하던 인도의 와인 수입 관세가 등급에 따라 20~30% 수준까지 낮아질 예정이다.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세계 최대 인구국의 문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셈이다.
가장 큰 변수는 역시 기후변화다. 지구가 더워지면서 프랑스가 수백 년간 지켜온 전통 품종과 원산지 인증(AOC) 체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프랑스는 다시 신대륙 와인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새 포도나무를 심어도 첫 수확까지 3~5년, 품질이 안정되기까지는 7~10년이 걸린다. 지금 당장 갈아엎는다고 내년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고가는 더 높은 곳으로, 저가는 다른 길로
결국 프랑스 와인은 고가는 더 높은 곳으로, 저가는 아예 다른 길로 갈라서고 있다. 누군가는 와인을 자산으로 만들고, 누군가는 포도밭 자체를 접고 있다. 와인이 국가의 정체성이었던 나라에서, 그 정체성을 다시 써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PS: 해당 글은 KBS온라인뉴스 크랩과 인터뷰를 하며 전달한 내용을 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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