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오늘도 셔플 합니다 (에필로그)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내 박자로 나이 들겠습니다

by손샤인

처음 셔플을 시작했을 때는 몰랐다. 운동화를 신고 음악 앞에 서서 발을 움직이는 일이 내 삶의 방향까지 조금씩 바꾸어놓을 줄은.


처음에는 그저 춤이 좋았다. 음악이 나오면 몸을 움직이고 싶었고, 어제 되지 않던 스텝이 오늘 되는 순간이 좋았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했고, 마음속에서 ‘오케이’라는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연습했다. 그렇게 하나씩 배우다 보니 어느새 누군가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었고, 혼자 시작한 춤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 있었다.


이 연재를 쓰며 지나온 시간을 다시 돌아보았다. 셔플을 배우던 나, 잘되지 않아 속상했던 나,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연습하던 나, 처음 누군가의 앞에 서서 가르치던 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들던 나. 그때는 각각의 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글로 이어놓고 보니 모두 하나의 길이었다.


그 길 끝에서 내가 얻은 것은 춤을 잘 추는 방법만은 아니었다.


나는 셔플을 통해 내 삶의 박자를 다시 듣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랫동안 정해진 박자에 맞춰 살았다. 해야 할 일을 하고, 맡은 자리를 지키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았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시간들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 다만 너무 오래 다른 사람과 세상의 박자에 맞추다 보니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가슴이 뛰는지는 잠시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게 셔플이 왔다.


음악을 틀어놓고 발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아내도,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도 아니었다. 잘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춤추는 나였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아무 목적 없이 무언가를 좋아해 본 것이 얼마 만이었을까. 무엇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좋아서 하는 일. 셔플은 오랜만에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데 나이를 먼저 계산하지 않게 되었고, 잘하지 못하는 나를 예전보다 오래 기다려줄 수 있게 되었다. 틀리는 것이 창피하지 않아 졌고, 모르는 것을 배우러 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무엇보다 ‘지금 시작해서 뭐 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늦은 시작이라는 것도 어쩌면 지나고 나서 붙이는 이름일 뿐인지 모른다. 내가 시작한 그날이 내게는 가장 빠른 날이었고, 그날 한 발을 내디뎠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다.


요즘 나는 내 몸의 변화를 조금씩 느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번아웃인 줄 알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평소 같으면 웃어넘길 일에도 괜히 예민해졌다. 그러다 문득 알았다.


아, 갱년기구나.


맨날 춤추고, 운동하고, 동안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살다 보니 나도 잠시 내 나이를 잊고 있었나 보다. 나는 잊고 있었는데 몸은 잊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했다. 마음은 아직 한참 젊은것 같은데 몸은 벌써 다음 계절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데 생각을 바꾸니 조금 괜찮아졌다.


사춘기도 한때이고 갱년기도 한때다. 사춘기가 봄으로 들어가는 시간이라면 갱년기는 가을로 들어가는 시간쯤으로 해두기로 했다.


가을도 꽤 예쁘니까.


봄에만 꽃이 피는 것은 아니고, 여름에만 삶이 뜨거운 것도 아니다. 가을에는 가을의 색이 있고, 겨울에는 겨울의 고요가 있다. 그러니 나 역시 지금의 계절을 굳이 거스르지 않아도 되겠다.


젊은 척하지는 않되, 늙은 척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지금의 나이로 살아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움직이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면서.


예전에는 나이 든다는 것이 하나씩 내려놓는 일인 줄 알았다. 체력도, 꿈도, 가능성도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쉰을 지나며 오히려 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


나는 이 나이에 새로운 춤을 배웠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에게는 없었던 이름들이 하나둘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나이 든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무언가를 잃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분명하게 알아가는 시간이라고.


좋아하지 않는 것에 애써 마음을 쓰지 않고, 좋아하는 것에는 조금 더 솔직해지는 시간. 남들이 정해놓은 속도보다 내 속도를 믿게 되는 시간. 그리고 남은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을 조금 더 야무지게 살아보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면 나이 드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셔플을 추다 보면 가끔 박자를 놓친다. 발이 꼬이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알고 있던 스텝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처음에는 한 번 틀리면 당황해서 그다음 동작까지 모두 무너졌다.


이제는 다르다.


틀리면 잠시 음악을 듣는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시 들어간다.


춤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내가 놓친 박자 다음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살아보니 인생도 그랬다.


내 삶에도 수없이 많은 엇박자가 있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길을 걸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이별을 겪었고,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그 순간에는 왜 내 인생만 박자가 맞지 않는 것 같을까 싶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엇박자까지 내 인생이었다.


한 번 틀렸다고 음악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늦어도 다시 박자를 찾으면 되었고,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다시 발을 옮기면 되었다.


어쩌면 잘 사는 것이란 한 번도 박자를 놓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놓쳤을 때 다시 자기 박자를 찾아가는 힘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완벽하게 살고 싶지 않다.


조금 틀려도 괜찮고, 조금 느려도 괜찮다. 남들보다 몇 박자 늦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음악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내 삶의 박자를 잃지 않는 것.


앞으로 내가 얼마나 오래 셔플을 출 수 있을지는 모른다. 언젠가는 지금처럼 빠르게 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날도 올 것이다. 지금 가볍게 뛰는 스텝 하나가 버거워지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음악을 듣는 마음까지 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주 천천히라도 좋다.


발끝으로 박자를 타고, 어깨를 조금 흔들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여전히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으면 좋겠다.


참 잘 놀았다.

참 많이 웃었다.

참 신나게 살았다.

그리고 참 많이 춤췄다.


이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나는 셔플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삶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춤을 배우는 이야기는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였고,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는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였으며, 가르치는 이야기는 다시 배우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에는 결국 한 사람이 있었다.


나.


오랫동안 다른 사람을 돌보고, 가족을 챙기고, 해야 할 일을 해내며 살아온 내가 쉰을 지나 다시 나를 재미있게 만들어가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끝을 말하고 싶지 않다. 아직 배우고 싶은 춤이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다.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쓰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무엇보다 아직 살아보고 싶은 날들이 많다.

그러니 이것은 에필로그이지만 끝은 아니다.


한 곡이 끝나면 다음 곡이 시작되듯, 이 이야기가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어떤 음악이 나올지는 모른다.

어떤 스텝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괜찮다.

모르면 또 배우면 되니까.


오늘도 운동화를 신는다. 음악을 켠다. 잠시 박자를 듣는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젊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신나게 살아내기 위해서. 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좋아하기 위해서. 남들보다 빨리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박자로 오래가기 위해서.


사춘기가 지나고 갱년기가 오듯 삶의 계절은 계속 바뀔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가을에도 춤출 거니까.

겨울이 와도 춤출 거니까.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박자를 놓치고, 또 몇 번이고 다시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배우고, 웃고, 사랑하고, 글을 쓰고, 춤추면서 나이 들고 싶다.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을 야무지게 셔플 한다.

그리고 내일도,

아마 나는 또 춤추고 있을 것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