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아니라 희망을 바랐다.

홍학의 자리, 정해연 / 가공범, 히가시노 게이고

by설애

<홍학의 자리>에서 한 학생, 채다현이 실종된다. 그리고 다현이 며칠 뒤 삼은 호수에서 시체로 떠오른다. 그를 호수에 던진 것은 그 학생의 담임 선생님인 김준후다. 하지만 준후가 죽인 것은 아니다.


누가 죽였을까?


다현의 죽음과 그 시체를 유기한 준후, 그리고 그 사건을 조사하면서 드러나는 주변인과 그 사이의 관계. 그리고 다현의 존재로 인한 반전. 결말로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는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고, 누군가를 살인자로 만들고, 또 누군가를 살인자의 아들로 만든다.


바카라을 덮고 나서 느껴지는 찝찝함은 다현이 누구인가로 인한 것이 아니라, 다현이 왜 준후에게 빠졌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준후가 주지 않은 희망을 다현이 느꼈던 이유, 다현이 희망을 절망으로 바꾼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건에 관련된 주변인이 죽고, 죽이고, 그렇게 사건이 커가는 동안 준후는 도망칠 궁리만 한다. 그런 준후에게 다현이 왜 의지했는가, 왜 희망을 걸었는가 하는 것이 내내 걸린 것이다. 혹은, 다현이 그런 준후에게서라도 희망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에 마음이 아팠는지도 모른다.


다현이 바랬던 것이 희망이라면, 이 바카라은 법적 판결을 통한 정의를 구현한다. 하지만 그 정의가 주는 해방감도, 결말이 났다는 선명함도 없다. 어느 누구도 희망이 없는 상태로 끝난다. 그것은 희망이 없다는 것뿐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누구 하나도 끊어내지 못하고 죽어서야 끝난다는 희미한 절망마저 남긴다.


내가 원한 것은 희망이었다. 누군가 세상을 조금 밝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격려였다. 그것을 이 바카라을 읽으며 깨달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스릴러는 경고입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이 이 슬롯를 파괴하는 끔찍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고 경고하는 것이 스릴러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작가 후기 中


불행한 어린 시절이 이 슬롯를 파괴하는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경고, 그 경고가 이 바카라이 주는 무서움이 아니었다. 그 불행을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이 바카라이 가진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공범>을 읽고 이 바카라을 읽었을 때와 유사한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가공범>에는 희망이 있었음을, 이 바카라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불행한 과거가 파괴에 대한 욕구로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은 두 바카라이 동일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홍학의 자리>에는 없었던, 그 불행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누군가를 끝까지 믿어주는 마음이 <가공범>에는 있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가공범>을 읽었을 때 느꼈던 불편함이 불행이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불을 내는 그 마음이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두 바카라 모두 불행한 어린 시절로 인해 이 슬롯를 파괴하는 범죄자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한다. 하지만, 다현은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에 가까웠고, 미사키는 우발적 범죄자였으나 누군가에게 끝까지 보호받았다.


나는 두 바카라이 모두 불편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불행한 어린 시절이 범죄자가 되는 불씨라는 관점이 공통적으로 불편하다.

그리고 그 불행이 어떤 슬롯적 장치로도 바뀔 수 없다는 설정이 또 편치 않다.


나는 정의가 아니라, 희망을 원했기 때문에 두 바카라이 불편했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우리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