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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벽이 되고 싶다

세상의 모든 흔들림을 받아안는 수직의 정적

by구시안
구시안 조용한 벽.png

벽은 단절을 위해 서 있는 듯하나

가장 깊은 침묵으로 한 세계의 안과 밖을 품는다.


언어 이전의 깊이로 단단하게 침묵하고,

끝내 터뜨리지 못한 서러움처럼 고요하다.

햇살과 소음이 한풀 꺾이고 지나간 자리에

벽은 홀로 서서 밤의 서늘한 무게를 받아낸다.


차가운 시멘트의 미세한 균열마다,

바랜 페인트의 허물어진 피부마다

누군가 두고 간 숨결의 흔적이 겹겹이 층을 이룬다.


기댈 곳을 잃은 자가 가만히 이마를 맞대던 자리,

어둠 속에서 밤새 번민하던 눈길이 오랫동안 머물던 기슭.

벽은 그 무엇도 튕겨 내지 않고

자신을 거쳐 간 한숨과 고독의 파문을

제 안쪽으로 가만히 받아들여 침전시킨다.


만물이 제 목소리를 높여 존재를 증명하려 할 때

벽은 오직 침묵으로써 세상을 수용한다.


말없이 솟아 있는 그 거대한 수직 속엔

도달하지 못한 사유의 수평선이,

우주보다 깊은 정적(靜寂)이 숨 쉬고 있다.

마침내 공간이 허물어지고 모든 형상이 스러지는 날에도

벽이 안고 있던 그 깊은 침묵의 궤적은

공기 중의 아득한 입자로 부유하며,

지상에 잠시 머물렀던 삶의 온기를 나지막이 말할 것이다.


조용한 벽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비슷한 사연, 비슷한 이름, 비슷한 나이, 비슷한 사람들에 대해 언제든 다가와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 낙서를 하고 가도 상관없는, 잠시 기대어 숨을 몰아쉬는 시간을 부여할 수 있는, 비밀을 아주 잘 지켜주는 조용한 벽. 계절에 스며든 이야기는 글이 되고 사람들은 정차하고 다시 떠나고를 반복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조용한 벽이고 싶다.


그렇게 벽이 간직한 침묵의 기슭에 멈춰 서면, 공간은 자신의 가장 아늑하고 깊은 속살을 내어준다. 벽은 단지 건물을 받치는 차가운 구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스쳐 간 수많은 생의 순간들을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고 받아낸 온유한 바탕이다.


누군가 홀로 눈물 흘리던 밤의 어둠도, 가만히 벽에 기대어 가슴을 쓸어내리던 서글픈 온기도 벽의 침묵 속에 스며들어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인다. 세상이 소란한 말들로 서로를 해치고 증명하려 할 때, 벽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가만히 굳건함으로써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고독에게 안전한 안식처가 되어준다.


마침내 그 묵직한 수직의 벽에 손을 얹을 때 느끼는 것은 차가움이 아니라,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존재만이 줄 수 있는 무조건적인 수용의 따스함이다. 비록 세월이 흘러 벽마저 허물어지고 흔적조차 아득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곳에 오랫동안 고여 있던 정적과 온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여전히 홀로 서성이는 또 다른 삶의 곁을 가만히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를 오래 지속하고 싶지는 않다.

아주 가끔씩 찾아오고

아주 가끔씩 나의 주변을 서성이면 좋겠다.


조용한 벽이 되고 싶다.

모든 말이 가시가 되어 돌아오는 날이면

스스로 조용한 벽이 되고 싶다.

너른 품으로 세상의 소음을 다 받아내면서도

단 한 마디의 변명조차 덧붙이지 않는 곳.


누군가 지쳐 가만히 이마를 맞대어 올 때,

어떠한 물음도 던지지 않고

묵묵히 그 무게를 함께 견뎌줄 수 있는 수직의 고요.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바람과 햇살의 지층이 자연스레 쌓이고,

소멸해 가는 것들의 쓸쓸한 그림자마저

아늑하게 안아줄 수 있는 굳건함.


마침내 내 안의 소란함이 모두 스러지고 나면,

누군가의 외로운 밤을 가만히 막아주는

투명하고 조용한 벽으로 서 있고 싶다.


벽이 되어 선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외로운 귀퉁이를 가만히 지키는 일이다.

누군가 찾아와 울음을 털어놓아도 묻지 않고, 바람이 지나며 스친 흔적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지탱할 힘이 되어주는 일. 스스로 벽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영혼은 소란스러운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 안의 깊은 정적을 되찾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고, 아무런 빛도 내지 않기에 타인의 슬픔을 아늑하게 어둠 속으로 받아 안을 수 있다. 그렇게 침묵으로 깊어진 자리는 마침내 거친 바람마저 순하게 잠재우는 온유한 안식처가 되기 위해 스쳐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 한 걸음을, 또 한자를 엮어 만든 문장을 남긴다.


지친 하루의 끝, 세상을 향해 세워두었던 모든 경계와 긴장을 내려놓고, 이제 당신 자신을 위한 조용하고 평화로운 벽의 안쪽에서 깊은 휴식을 누리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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