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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기억하는 최초의 그늘

나를 지탱하는 어둠의 골격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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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태반을 떠나오던 날 빛은 송곳처럼 눈꺼풀을 찌르고 세상은 붉은 소음으로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숨을 쉬라는 명령, 채찍처럼 허공을 가르는 첫울음 뒤에서 살점보다 먼저 서늘하게 식어 내리던 칼날. 그것은 빛의 뒷면에 몰래 접혀 있던 최초의 그늘이었다.


살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말하지만 살은 계절을 타고 매번 허물어지는 거짓. 희로애락의 때가 묻은 가죽을 다 게워내고 비로소 하얗게 드러나는 기둥, 뼈만이 그날의 서늘함을 잊지 않는다.


타인의 다정한 손길이 스쳐 지나갈 때도, 화려한 조명 아래 승리의 잔을 들어 올릴 때도, 깊은 척추 마디마디마다 이슬처럼 고여 있던 그 아득한 허기가 지는 이유. 그것은 세상이 매겨준 이름보다 오래된 그늘이자 내가 나이기 위해 치러야 했던 첫 번째 고독이었다.


빛을 좇아 내달리던 발목이 부러지고 뼛속에 스며든 그늘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나를 진짜 살아가게 하는 것은 부서지는 햇살의 눈부심이 아니라, 어둠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도 내 영혼의 골격을 끝까지 지탱해 주던 그 조용하고 아득한 그늘이었음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껍데기가 다 타버린 뒤에도 내 뼈는 마지막까지 묵묵히 쥐고 있을 것이다. 태어난 순간 내게 허락되었던 오롯하고 존엄한 나만의 빈자리 하나를 유지하면서.


아기는 울며 공기를 삼켰으나 공기보다 먼저 폐부 가장 깊은 골짜기, 아직 말랑한 뼈의 관절마다 들어앉은 것은 억만년 동안 누적된 타자(他者)의 서늘함을 느꼈다. 살은 자라며 계절의 때를 타고 부풀고 짓무르며 성장을 흉내 내지만 피부 아래 묵묵히 하얗게 익어가는 기둥, 뼈는 정직한 그늘의 기억을 사수했다.


누군가의 체온에 취해 스스로가 하나의 완성된 빛이라 착각할 때도 척추 마디마디를 타고 내리는 아득한 한기. 그것은 사랑이 미처 메우지 못한 생의 구멍이자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얹혀사는 나그네라는 증거일 것이다. 늙은 나무가 제 몸속에 나이테라는 그늘을 말아 쥐듯 인간은 제 뼛 속에 최초의 어둠을 주형(鑄型)하여 걸어간다.


햇빛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릴 때 그 빛을 받쳐 들기 위해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고요히 견디는 뼈.

마침내 한 생의 무거운 가죽이 다 타버리고 잿더미 속에서 하얗게 건져 올려질 마지막 정적, 그 고결한 유골이야말로 세상이 다 빼앗아가지 못한 단 하나의 거룩한 그늘. 그 그늘의 힘으로 부서지지 않고 오늘도 나라는 궤도를 완주하고 싶어 한다.


지치면 잠시 앉아 숨을 쉬고

다시 길을 나서는 반복이다.


잿더미 속에서 건져낸 것은 한 인간의 번민이 태워버리지 못한 단단한 대리석의 절편.

불길은 살점을 다 파먹고 피의 끈적한 집착을 모두 증발시켰으나 뼛속 깊이 각인된 그늘만은 탄화(炭化)되지 않은 채 하얗게 남았다. 그것은 생전의 내가 빛을 향해 소리 없이 지르던 비명의 형태이자, 지상에 잠시 머물며 빌려 썼던 시간이라는 중력을 견뎌낸 침묵의 밀도다.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살은 쉽게 썩고 이름은 풍화되지만 그늘을 품고 굳어진 뼈는 지층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언젠가 피어날 또 다른 생의 뿌리를 가만히 받친다. 누군가 이 석회의 파편을 주워 들 때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죽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끝내 부서지지 않고 자신의 골격을 지켜낸 한 존재의 단단한 긍지를 지녀도 무방한.


태초에 슬픔처럼 부여된 그늘이 마침내 하나의 아치가 되어 세상의 모든 흔들리는 영혼 위로 거룩한 지붕을 올린다. 그들이 모여 사는 곳이 이 도시이며, 세상이다.


그것이 뼈가 품었던 그늘의 마지막 대답을 향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빛의 환영에 속지 않고 제 안의 어둠을 직시하며 견뎌낸

단 하나의 정직한 문장으로 지상에 남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기록이 되건, 빛바래져 가는 일기장이 되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되건 상관없다.


나의 뼈가 기억하는 최초의 그늘은 고요하고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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