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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찰을 잃어버린 피부의 고독

스치지 못하는 존재들의 긴 활강(滑降)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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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쓰다듬어도 온기를 넘겨주지 못하고 바람이 스쳐도 서늘한 흔적조차 맺히지 않는다.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문장들이 모두 미끄러운 빙판처럼 언어를 밀어내고 있다. 잡으려 손을 뻗으면 사물은 닿기도 전에 지평선 너머로 미끄러지고 내가 밀어내려 했던 슬픔조차 피부 표면에서 무마찰의 곡선을 그리며 떨어져 나간다.


거칠었던 시간의 감촉, 손바닥에 새겨졌던 깊은 굳은살과 누군가의 체온이 남기고 간 뭉클한 자국들. 저항이 있던 시절엔 상처도 흉터도 무게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 어떤 엇갈림조차 내게 인장을 새기지 못한다.

부딪쳐 꺾이는 소리가 사라진 세계, 저항을 잃은 살갗은 끝없는 평면이 되어 공기 중의 먼지 하나조차 끌어안지 못한다.


미끄러짐이라는 절대의 고요. 너를 만지기 위해 내가 바쳐야 했던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던 그 작은 거칠음이었나.


충돌하지 않으므로 부서지지도 않지만

스치지 못하므로 나라는 존재는 점점 더

투명한 무게로 이 우주를 지나쳐 간다.


질감을 잃어버린 세계의 중심에서 나는 나를 겨우 느낀다, 아무것도 붙잡지 못해 흘러넘치는 이 완벽하고도 차가운 평화 속에서.


잡히지 않는 살갗 아래로 흐르지 않는 피가 빙하처럼 굳어갈 때, 나는 잃어버린 '저항'을 찾아 무디어진 손가락 끝을 바닥에 문지른다.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의 촉감. 그 어떤 고통도 내게 생채기를 내지 못하는 이 완벽한 무풍지대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얼마나 지독하게 파멸해 있는지 깨닫는다.


차라리 나를 찢어다오, 뾰족한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후벼 파고 짓무른 상처 사이로 뜨거운 고름이 흘러내리게 해다오. 피 흘리지 않는 피부는 삶의 증거가 아니며, 부딪쳐 비명을 지르지 않는 영혼은 이미 죽은 자의 시신에 다름없으니. 그때, 멀리서 아주 작은 빗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나의 무감각한 어깨를 때리고 아무런 저항 없이 미끄러져 내리는 수많은 방울들. 아, 비마저도 내게 머물지 못하고 세계는 나를 통과하여 저 멀리 흘러만 가는구나


나는 손을 뻗어 하늘을 쥐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허공이 무너지듯 흘러내리고, 나는 마침내 깨닫는다.

마찰을 잃어버린 자에게 부여된 구원은 타인에게 닿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깎여 나가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임을.


그리하여 나는 나의 피부를 가만히 찢어발겨 그 속에서 피어나는 첫 번째 고통의 온기를 세상에서 가장 거친 감각으로 끌어안는다.


손톱을 세워 바닥을 그어보아도 소리 없는 패임만이 미끄러질 뿐, 나라는 실존은 어디에도 흠집을 남기지 못한다 결국 내가 도달한 마지막 풍경은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나조차 나를 잡을 수 없는 영원한 활강(滑降)의 끝.


바람이 분다. 바람마저 나를 비켜 지나가고 나는 아무런 무게도, 저항도 없이 이 완벽하고 사나운 고요의 한가운데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러져 내려간다.


어디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삶, 어디에도 흉터를 새기지 못한 존재.

나의 마지막 고독은 비명조차 올리지 못한 채 이 차갑고 아득한 은반 위에서 침묵의 완성으로 조용히 닫힌다.


마찰을 잃어버린 피부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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