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살로 걸어 들어가는 새벽
어둠이 가장 묵직하게 바닥을 누르는 밤 11시.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온 시간.
누에가 제 몸을 짓누르던 허물을 가르고 나오듯 작고 야윈 소음이 방 안을 채운다. 마른 피부 표면에서 어제의 껍질이 조용히 바스라지는 소리다. 그동안 나는 어제라는 허물을 옷처럼 옷장에 걸어두고 날마다 돌려 입었다. 타인의 시선이 묻어난 구겨진 깃, 섣부른 말들이 남긴 얼룩, 미처 삼키지 못한 자바카라의 입김이 섬유 마디마다 지독하게 배어 있던 옷. 그 옷을 벗지 못해 나의 오늘들은 늘 어제처럼 눅눅했고, 걸음마다 오래된 흙먼지가 날렸다.
벗어던진다는 것은 한순간의 화려한 결단이 아니라, 나를 오래도록 옭아매던 고요한 습관과의 아픈 이별이다. 마른 딱지를 떼어낼 때 밑살이 비명을 지르듯, 굳어버린 안주와 피로를 살점처럼 떼어내는 일은 서늘하고도 쓸쓸한 통증을 동반한다. 껍질을 벗어놓고 선 맨몸은 오한에 떨지만, 그 떨림이야말로 비로소 피부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다. 허물을 벗어버린 자리에는 아주 얇고 투명한, 그래서 세상의 자그마한 온기조차 온전히 느껴지는 새살이 분홍빛으로 돋아난다.
돌아보면 어제의 나 역시 나를 살리기 위해 겹겹이 두르고 있던 보호막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지키기 위해 단단하게 굳어졌던 그 껍질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여 안녕을 건넨다. 이제 바닥에 스르르 무너져 내린 허물은 지나온 계절의 흔적으로 남겨두고, 나는 문을 열어 새벽의 서늘한 공기를 맨살로 맞이한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오늘이라는 빛이 막 허물을 벗은 내 마른 어깨 위로 조용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빛이 어깨에 닿는 순간, 맨살은 차가움 대신 알 수 없는 아찔함을 먼저 느낀다. 나를 온전히 감싸고 있던 두터운 어제가 사라진 자리, 바람은 가차 없이 피부에 와닿고, 나는 문득 내가 얼마나 가벼워졌는지, 동시에 얼마나 무방비하게 세상에 던져졌는지를 깨닫는다. 보호막을 잃은 두려움이 허벅지를 타고 경련처럼 올라오지만, 그 공포는 나쁘지 않다. 그것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날카로운 감각이다.
방 한가운데 허물처럼 둥그렇게 말려 있는 어제의 옷가지를 내려다본다. 그 안에는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타인의 칭찬, 버리지 못한 작은 원망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을 규정짓던 무수한 단어들이 말라붙은 허껍데기로 남아 있다. 그것들은 이제 내가 아니다. 단지 내가 지나쳐 온 어느 계절의 단단한 흉터일 뿐. 나는 그 허물을 치우거나 감추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문턱 너머의 여명 속으로 한 발을 내딛는다.
새살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매 순간 피부를 새로 찢는 일과 같다. 완성된 어제로 돌아가는 편안함 대신, 덜 자란 오늘로 살아가는 불완전함을 택하는 일. 하지만 공기를 가르는 내 어깨 끝에서 마침내 팽팽하게 당겨지는 생의 감각을 느낀다. 나는 더 이상 어제라는 단단한 궤적을 밟지 않는다. 오직 맨발에 닿는 이 서늘하고 부드러운 흙의 감촉만을 믿으며, 나는 아직 쓰이지 않은 나를 향해 천천히, 그리고 깊게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지나온 어제의 껍질을 등 뒤로 하고 서면, 세상은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다만 아득하도록 거대한 침묵으로 나를 맞이한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몸 위로 새벽의 서늘함이 죄의식처럼 짓눌려 오고, 버려진 허물에서 흘러나온 기억의 악취가 발목을 잡는다. 어쩌면 나를 온전히 벗어던졌다는 확신마저 또 하나의 오만이었을지 모른다.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이 환멸과 구원의 굴레 속에서, 나는 결국 단 한 번도 나라는 지옥을 완벽히 탈출해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살점이 귀퉁이부터 찢겨 나가는 통증을 견디며 마주한 이 막막함이야말로, 내가 아직 어제의 썩어가는 사체 속으로 굴러떨어지지 않았다는 유일한 증거다.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숭고하지 않아도 좋다. 핏물이 가시지 않은 헐벗은 새살을 끌어안고, 나는 그 저주받은 삶의 진흙밭 속으로 다시 한번 기꺼이 걸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를 온전히 부수고 파헤침으로써, 나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잔잔하고도 지독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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