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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

과거를 변호하는 마음에 관하여

by구시안

“기억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


프랑스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의 이름으로 알려진 이 문장은 인간의 심리를 서늘할 만큼 예리하게 관통한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세상으로 나서기 전, 가죽 재킷을 걸쳐 입던 순간이었다. 문득 그 문장이 떠올랐다. 옷깃에 스민 냉기보다 먼저, 오래 묻어 두었던 어떤 기억의 가장자리가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기 위해 스스로 눈에 색맹을 들이는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견딜 수 있는 만큼만 기억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계의 색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가장 교묘한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뇌는 카메라처럼 한 장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은 당시의 감정과 현재의 상황, 그리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지나간 사건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지만, 그것을 떠올리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질 때마다 기억의 윤곽도 조금씩 변한다. 마침내 자신에게 불리한 진실은 희미해지고,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들만 선명하게 남는다.


그것은 기억의 악의라기보다 인간이 자신을 보존하는 방식에 가까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과거를 편집하고, 편집된 과거를 근거로 현재의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온전히 살아가기 어려운 날들이 있다는 것을 나 역시 안다. 그러므로 기억을 의심한다는 것은 기억을 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자신을 지켜 주었던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를 지우는 대가로 유지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자는 뜻이다.


어쩌면 성숙이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까지 빠짐없이 소환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기억이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서둘러 변호인을 부르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 그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삶은 계속될 수 있음을 아는 일. 잘못을 저지른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앞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모순 없이 받아들이는 일.


과거는 지나갔지만,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끝내 바카라임져야 하는 것은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기억을 이용해 오늘의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들을 탓할 수는 없지만, 잊었다는 이유로 모든 바카라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누군가의 삶에는 자신이 남긴 흔적이 계속되고 있을 테니까.


언젠가 지금의 자신을 다시 기억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를 어떻게 증언할까. 그 질문 앞에서만큼은 아직 판결을 내리고 싶지 않다. 대신 오늘 내가 하는 말과 오늘 내가 외면하는 얼굴들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려 한다. 훗날의 기억이 나를 변호하기 위해 필요로 할 이야기를, 지금의 내가 너무 쉽게 만들어 놓지 않도록.


기억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장 억울하다고 느끼는 순간에야말로 가장 오래 침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오래된 상처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너무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타인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기억은 언제나 유리한 증언을 한다.

시간의 법정에는 판사가 없고 증인석에는 마모된 미러볼 하나만 남아 구른다. 빛을 받으면 피어나는 무수한 궤적 중 내가 고른 장면만이 빛을 얻어 춤을 춘다.


내가 버린 도망의 신발은 어느새 핍박받던 순교자의 들꽃으로 피어나고, 그대 얼굴에 뿌렸던 서슬 푸른 칼날은 나를 지키려다 베인 장엄한 흉터로 둔갑한다.


녹슨 태엽을 반대로 돌릴 때마다 뇌각(腦角)의 어둠 속에서 세공사들이 바쁘다. 비겁함의 각도를 슬그머니 뒤틀고 거짓 눈물의 음량을 가만히 높인다. 상처는 언제나 내 가슴에만 새겨진 붉은 주사(朱砂)가 되고, 그대의 피 흘림은 무대 뒤편의 희미한 그림자로 지워진다.


아, 인간이라는 위대한 극작가여. 스스로가 쓴 비극의 가장 서글픈 주인공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실의 목을 조용히 비틀어 왔는가.


오늘 밤에도 침묵의 재판장은 열리고 내 안의 늙은 변호인은 눈 하나 까딱 않고 외친다.

나는 피해자였노라고.

그 모든 파국은 오롯이 어둠의 탓이었노라고.


배심원도 없는 방 안에서 내가 나에게 내리는 무죄선고.

가장 완벽하고 뻔뻔한 신화는 그렇게 매일 밤, 내 머리칼을 빗겨주며 새로이 조각된다.


그러나 무죄의 성벽 뒤편, 유폐된 진실은 결코 썩지 않는다. 지워진 문장들은 야경꾼의 발소리처럼 밤마다 귓전을 서성이고, 문틈으로 새어 드는 차가운 바람은 가장 부드럽게 세공된 거짓의 껍질을 때린다.


어쩌면 우리가 유죄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형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완벽한 신화 속에서 진짜 나라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져버릴까 하는 가장 깊은 고독 때문일지도 모른다.


촛불이 꺼지고 마지막 변호인마저 잠든 정적 속, 거울 앞에 서서 물어본다.

승리뿐인 나의 기억 속에서 나에게 패배하여 사라진 진짜 나는 지금 어느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가.

정확한 색을 보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만든 또 다른 색을 보고 있는 색맹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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