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 납품구조가 만든 마케팅 역량의 부재
해외 전시회에서 한국 기업 부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늘 익숙한 장면이 있다. 제품은 훌륭하고 시연도 잘 되고 카탈로그도 깔끔하다. 그런데 부스 안에서는 우리 직원들끼리 나누는 대화만 들린다. 명함첩에는 국내 대기업 담당자의 이름이 있고, 일정표에서 해외 신규 바이어 미팅 칸은 비어 있다.
해외 전시 참가를 자문하면서 비슷한 장면을 수없이 보았다. 처음에는 부스 위치와 디자인, 통역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걸 다 고쳐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 기업이 있었다. 문제는 부스가 아니라 회사 안에 있었다.
늘 반복되는 문제는 일단 목표 바이어가 불분명하다. 새로운 고객보다 기존 거래처와의 미팅이 앞선다. 사전 미팅이 없다. 부스에서는 제품을 설명하느라 바쁘고 고객의 문제를 묻지 못한다. 명함은 쌓이지만 전시 후 Follow-up이 이어지지 않는다. 전시회가 하나의 독립된 세일즈 프로세스로 굴러가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 기업들에 기술이 없는 것일까? 아니다.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고객을 찾는 역량이다.
그간 한국 경제성장 모델은 대기업 중심의 수직 공급구조였다. 이는 한국 제조업을 키운 성공 모델이다. 상위 기업이 제품 기획과 R&D, 사양을 정하면 협력기업은 품질과 원가, 납기에 집중했다. 그 덕에 중소기업은 안정적인 물량과 기술 이전을 얻었다. 한국이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한 건 바로 이러한 대기업-중소기업 간 효율적인 분업이었다.
다만 기업의 학습은 필요한 곳에서만 쌓인다. 어떻게 잘 만들 것인가는 깊어졌지만 누구에게 무엇을 팔 것인가는 훈련할 기회가 적었다. 시장을 조사하고, 고객을 정의하고, 낯선 바이어를 먼저 찾아가 관계를 만드는 일은 납품구조 안에서는 필요성이 낮았다. 누구의 의도도 아니다. 과거의 합리적 선택이 이후 기업의 역량 배분을 규정하는 '구조적 경로의존성'이다.
이 가설을 자료로 확인해 보았다. 인과를 직접 입증한 통계는 없지만, 정황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첫째, 납품구조는 제조업에 집중되어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2024년 기준 중소기업실태조사」에서 수급기업은 소상공인을 제외한 중소기업의 16.7%다. 전체로 보면 소수다. 그러나 제조 수급기업의 위탁기업 의존도는 72.5%로 다른 업종보다 높다. 이 글의 이야기는 '중소기업 전체'가 아니라 '제조 중소기업'의 이야기다.
둘째, 시장개척의 병목은 기술이 아니라 거래처 발굴이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6년 조사(내수기업 304개사)에서 수출을 중단한 기업이 꼽은 1위 원인은 '해외거래처 발굴의 어려움'(39.2%)이었다. 자금·인력 부족보다 훨씬 높았다. 직수출을 시도하지 않는 기업의 1위 이유는 '대기업 납품을 통한 간접 수출'(25.7%)이었다.
지금까지는 이 공백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납품 물량이 유지되는 한 고객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 고객에 대한 의존이 위험이 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OEM·ODM을 넘어 자체 브랜드와 자체 시장을 만들어야 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여기서 전시회가 시험대(Litmus Test)가 된다. 한정된 공간에서 짧은 시간 동안 낯선 고객을 만나야 하는 전시회에서는 평소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앞의 장면을 역량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 타깃이 불분명하다 → 시장 세분화와 고객 정의 훈련이 부족하다.
. 기존 거래처 미팅에 치중한다 → 낯선 고객보다 익숙한 관계로 돌아가는 납품구조의 습관이다.
. 사전 미팅이 없다 → 먼저 다가가는 아웃리치 경험이 적다. 납품구조에서는 발주가 먼저 오기 때문이다.
. 제품 설명에 집중한다 → 고객의 문제를 묻는 훈련이 적다. 사양이 주어지는 환경에서는 '무엇을 만들까'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까'에 답해 왔다.
. Follow-up이 없다 → 리드를 관리하는 세일즈 프로세스와 조직이 없다.
부스 디자인은 예산만 있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고객 정의와 아웃리치, 리드 관리는 예산만으로 살 수 없다. 중소기업의 전시 성과를 부스나 현장 운영 기술의 문제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따라서 정부의 전시회 지원 정바카라도 이 시험대에 맞춰야 한다. 지금의 해외전시 지원은 참가비와 부스비를 지원하고 그 결과를 사후에 확인하는 구조가 중심이다. 참가를 늘리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기업 안에 시장개척 역량이 쌓였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몇 개 기업을 보냈는가'에서 다음 질문으로 옮겨 가야 한다.
. 몇 개의 타깃 바이어를 정의했는가
. 몇 건의 사전 미팅을 확보했는가
. 몇 개의 Qualified Lead를 확보했는가
. 전시 후 Follow-up이 이루어졌는가
. 상담이 PoC·견적·계약으로 전환되었는가
이 다섯 가지는 결과 지표이면서 동시에 기업이 배워야 할 역량의 목록이다. 기업이 이를 하나씩 익히면 지원이 끝난 뒤에도 스스로 고객을 찾을 수 있다. 사전 마케팅과 사후관리에 쓰는 비용도 지원 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 성과는 전시장 안이 아니라 전과 후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국 중소기업에는 기술이 있다. 바이어도 한국 기업의 기술력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기술을 알아봐 줄 고객을 스스로 찾아내는 힘이다. 과거에는 중요하지 않았던 이 역량이 이제 새로운 경쟁력이 되었다. 지금처럼 전시회에 보내 주는 데 그치는 지원 정바카라은 기업을 다음 전시회에도 같은 자리에 세워 둘 것이다.
이제 중소기업 지원의 목표는 해외전시회에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기업 스스로 고객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중소기업의 글로벌 마케팅 경쟁력을 키우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