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내게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를 줄 알았다. 적어도 십자가 아래에서는 자본주의의 계급장이 무의미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성전 문턱을 넘는 순간, 그 믿음은 은근하고도 세련된 방식으로 배반당했다.
노골적으로 돈 없는 자를 차별 대우하지는 않는다. 다만, 헌금을 많이 내는 중직자들의 의견은 언제나 교회의 중요한 결정 방향이 되고, 그들의 자리는 강단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마련된다. 목사님들은 종종 단상에 서서 "형편이 어려운데도 온 힘을 다해 헌금한 성도들을 보면, 액수와 상관없이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아름다운 미담처럼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돈이 있든 없든 당신의 주머니를 최대한 털어내라는 압박이 숨어 있다.
이때 가장 단골로 동원되는 성경 구절이 전 재산인 동전 두 닢을 바친 ‘과부의 두 렙돈’ 비유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이 본문이 가난한 자의 헌신을 칭찬하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마가복음 12장 40절의 문맥을 다시 천천히 곱씹으며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은 바로 직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율법학자들을 향해 매서운 저주를 퍼부으셨다. 그렇다면 두 렙돈의 이야기는, 가난한 과부의 마지막 생계비마저 바치게 만든 성전 체제를 향한 탄식이자 고발은 아닐까.
이러한 성전의 타락은 초대형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거쳐왔던 평범한 지역 교회들에서도 그 풍경은 반복되었다. 강단에서는 종종 예배당 인근의 부지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사들인 것을 두고 예비하신 은혜라며 환호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자본주의적 탐욕에 십자가라는 거룩한 상표를 붙여놓고, 건축과 재정 확장을 위대한 실적이자 축복이라 부르는 기만. 그곳에서 신은 헌금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부동산과 세상의 복을 뱉어내는 자판기로 전락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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