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

- 바카라상 위에서 물건을 치운 뒤에

by서히

물건들을 거두어내자,
비로소 바카라상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인다.
방금까지 무언가의 무게를
묵묵히 받쳐내던 자리.
내 손길이 습관처럼 닿고
눈길이 머물던 지점들이
이제는 아무런 간섭 없이
말갛게 드러나 있다.


바카라상은 본래 이토록 넓고
아득했던가.
가려져 있던 매끈한 나무 결이
처음 만나는 타인처럼
낯설게 말을 건다.
무언가를 얹어두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조용한 공간이었는지,
공간이 제 몸을 드러내고 나서야
그제야 알게 된다.

그 자리에 무엇이 놓였었는지는
굳이 되짚지 않는다.
사라진 사물의 형체보다
그것이 남기고 간
‘빈자리’의 부피가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바카라상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잠시
그 투명한 무게를 바라본다.

정리된 풍경이라기보다는,
익숙한 것들이 빠져나간 뒤
고인 얇고 서늘한 공백에 가깝다.
바카라상은 여전히 같은 바카라상이지만,
이제는 내가 알던 곳과는
조금 다른 장소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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