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표시

by서히


바닥에 희미한 표시가 남아 있다.
한때는 엄격한 직선으로
누군가의 걸음을 통제했을 선들이다.
수천 개의 신발 밑창과
겹겹이 쏟아진 빗줄기에 깎여 나가며
그것은 이제 지시라기보다 바닥의 흔적에 가까워졌다.


가까이 숙여 보아야만 간신히 드러나는 형태.
멀리서 보면
그저 아스팔트에 남은 얼룩처럼 보인다.
그곳에는 따라가야 할 권위도,
멈춰 서야 할 이유도 남아 있지 않다.

표시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기능을 내려놓은 상태다.
왼쪽으로 가라는 말도,
멈추라는 신호도 보내지 않는다.
오직 그 자리에 존재했던 시간만이
닳아버린 페인트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보폭으로 그 위를 지난다.
누군가는 무심코 밟고, 누군가는 우연히 비켜 간다.
이제 그 선은 선택을 재촉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서서 그 흐릿한 흔적을 내려다본다.
그것이 가리켰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시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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