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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슬롯 시간에 경제를 배우며 처음 접했던 단어들이 있다. 생산, 소비, 희소성, 그리고 기회비용. 특히 선택과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기회비용은 우리가 삶 속에서 매 순간 마주하는 개념이다. 무언가를 선택했을 때 자연스럽게 지불하거나 포기해야만 하는 가치. 처음 이 단어를 배웠을 때만 해도 나는 기회비용을 철저히 숫자와 돈의 차원으로만 이해했다. 더 큰 이익이 남고 손해가 적은 쪽을 저울질하여, 그 비용이 가장 적은 곳으로 향하는 것이 언제나 바람직한 선택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인 손익계산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만족감, 행위 자체의 가치, 보이지 않는 감정의 크기 역시 얼마든지 기회비용으로 환산될 수 있었다. 터무니없는 바가지요금인 줄 알면서도 여행지의 호객 행위에 넘어가 조악한 기념품을 사들일 때, 혹은 투자하는 시간과 돈의 이해타산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함에도 맹목적으로 누군가의 콘서트장으로 향하고 굿즈를 사 모을 때가 그렇다. 객관적인 셈법으로는 명백한 손실일지 몰라도, 내 마음의 포만감을 가장 큰 가치로 상정한다면 이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그런데 이 기회비용이라 칭하는 것들의 정의를 이리저리 늘리다 보면, 결국 하나의 씁쓸하고도 재미있는 진실에 가닿게 된다. 어쩌면 기회비용이란, 내가 이미 마음속으로 내려버린 결정에 뒤늦게 갖다 붙이는 그럴듯한 핑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기준들을 세워 꽤 합리적인 선택을 내렸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그 치밀한 계산은 대개 이미 한쪽으로 푹 기울어진 마음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결국 기회비용이란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덜컥 저질러버린 선택 뒤에, 내 안의 이성을 안심시키기 위해 정성스레 써 내려가는 일종의 '사후 협의록'인 셈이다.
이 얼마나 어설프고 다정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합리화인가. 때로는 치밀한 이성보다 먼저 앞서 나가는 마음의 속도를 쿨하게 인정하고, 스스로가 만들어낸 그 귀여운 사후 협의록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도장을 찍어주며 살아가는 것도 꽤 나쁘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