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표시

by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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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내 물건에 이름을 쓰는 일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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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연필에도 이름을 쓰고, 체육복에도 이름을 달았다. 비슷한 물건이 많으니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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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영역표시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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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라상 위에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텀블러 하나, 카페에 가면 유난히 마음에 드는 구석자리, 냉장고에서 누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음식 하나.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기는 내가 편안한 곳’이라고 표시해 두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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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도 영역이 있다.

혼자 있고 싶은 시간, 쉽게 빌려주고 싶지 않은 물건,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좋은 사람이라면 웬만한 것은 받아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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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영역표시를 잘하는 사람이 편안하다.

여기까지는 괜찮고, 여기부터는 조금 불편하다고 알려주는 사람. 상대의 영역을 함부로 넘지 않는 사람. 서로의 선을 알고 나면 이상하게 관계가 더 오래 편안하게 유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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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영역표시는 밀어내기 위한 표식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까지인지 알려주는 일은 상대에게 어디까지 다가와도 되는지를 알려주는 일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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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요즘은 내 주변에 작은 표지판을 몇 개 세워두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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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는 표시. 이것만큼은 내 방식대로 하고 싶다는 표시. 오늘은 조금 천천히 말해달라는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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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자리를 내가 먼저 알아두는 것. 어쩌면 그것이 어른이 된 뒤에 배우는 가장 조용한 영역표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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