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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눈을 꿈뻑거리기만 해도 건조해진 각막이 눈꺼풀에 달라붙는 기분이 들고, 퇴근하려 주차장에 있던 차 문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손바닥에 가득 꽃가루가 묻어나오던 나날들. 이렇게 흠뻑 내릴 봄비를 미리 예견하고서 세차 하지 않길 잘했지, 라고 얌체같은 뿌듯함을 느껴본다.
실은 비오는 날을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비오는 날을 (많이) 싫어했었다. 비오는 날 특유의 흐리고 습한 기운 덕분에 철저히 날씨를 추종하는 내 바이오리듬은 추락하는 하락세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뚜벅이 출퇴근러였던 시절에는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기 싫다,를 마치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지금도 그리 즐기지는 않는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 전적으로 싫거나 좋은 것은 없지 않은가. 비오는 날에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장면과 감정들 몇몇이 비오는 날의 나를 구원해 준다. 둥둥 떠다니던 흙먼지들이 물방울에 씻겨 1.5배는 더 또렷해진 듯한 온 세상의 풍경. 높아진 해상도의 풍경들을 보며 나 역시 조금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든다. 평소와 똑같은 것들인데도 왠지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들. 따뜻한 드립커피, 좋아하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취향의 음악과 커피 안주로 안성맞춤인 부드러운 티라미수 같이 '비오는 날 효과'로 인해 증폭되는 것들.
그리고 하나 더. 활짝 핀 꽃들이 빗방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 위로 흩어져 내린 모습들. 이상하게도 나는 만개한 꽃들을 바라보는 것 보다 떨어진 꽃잎들이 비에 젖어 땅에 촉촉히 내려앉은 모습에 더 마음이 간다. 처연하다거나 애달픔이 느껴지기 보다 그냥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생에 비유하자면 이제 찬란히 빛나며 풍파에 휘날리던 시기를 지나,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시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 둥지를 틀고 앉은 자리에서 남은 생을 채워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빗발에 떨어진 꽃잎들이 떨어진 자리에서 촉촉히 젖어가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오늘의 장면은, 진홍빛 철쭉꽃들이 땅위에 흐드러지게 흩어진 모습이다. 줄기에서 자라나 꽃봉오리를 맺고, 온 힘을 다해 꽃망울을 피워냈으니, 이제는 편안히 온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내려앉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