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 UN] 스톱워치와 유엔 합의 10

Epilogue — 진짜 업무의 시작

2016.12월 어느 추운 겨울 유엔 본부 지하 제5회의실(Conference Room 5).


“코디네이터, 잠깐만.”


회의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누군가는 내 직함을 성처럼 불렀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돌렸다. 복도의 공기는 늘 미지근했고, 유엔 건물 특유의 냄새—카펫에 밴 먼지와 오래된 커피, 프린터 토너—가 목 뒤에 밴 채였다. 마이크 불이 꺼진 지 몇 분이 지났는데도, 귀에서는 아직도 통역 채널의 얇은 잡음이 남아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는 내가 ‘모굴’이라 생각한 대표였다. 길게 말하는 것을 예의로 포장하던 사람. 방금 전, 그는 단 한 문장으로 끝을 냈다. 우리가 합의한 시간 계획대로 가자. 그 말이 방을 봉합했다. 나는 그에게서 승리의 미소도, 패배의 표정도 읽지 못했다. 대신, 오래 훈련된 얼굴에 잠깐 비친 ‘계산이 끝난 사람’의 평정을 봤다.


“감사합니다.” 나는 자동처럼 대답했다. 감사는 여기서 감정이 아니라 접착제였다.


그는 내 주머니 쪽을, 아니 정확히는 주머니 속의 스톱워치 쪽을 힐끗 봤다. “그거, 정말로 쓰는 겁니까? 장식이 아니라?”


“장식이면 좋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장식은 시간을 만들지 않으니까요.”


그는 낮게 웃었다. 웃음은 짧았고, 그래서 더 진짜처럼 들렸다. “오늘은 공정했어요. 적어도 공정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카드 한 장을 내 손바닥에 밀어 넣었다. “다음 번엔, 제 말이 길어질 때 먼저 쳐 주세요.”


카드는 얇았지만, 그 얇음 속에 대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내게 부탁을 했고, 부탁은 곧 관계였다. 제5위원회에서 관계는 언제나 절차보다 오래 남는다. 나는 카드를 바로 지갑에 넣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더 만졌다. 종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만 거짓말을 한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바카라상 위에는 회의 전부터 펼쳐 두었던 종이들이 그대로 있었다. ‘Agenda item 133’이라는 숫자가 찍힌 표지, 그리고 그 아래에—Proposed programme budget outline for the biennium 2018–2019. 종이의 문장들은 언제나 단정했다. 단정함이야말로 이 건물에서 가장 위험한 위장이다.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스톱워치를 꺼냈다. 버튼 하나를 눌렀다. 초침이 멈추는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늦게 따라 멈췄다. 회의는 끝났다. 그러나 내 손은 멈춘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습관처럼 노트북을 열고 전원을 눌렀다. 화면이 켜지며, 어둠이 얇게 갈라졌다.


‘쟁점 추적표’ 파일을 새로 만들었다. 나는 문장보다 먼저 표를 만든다. 말로 남은 갈등은 감정으로 남지만, 표로 옮기면 항목이 된다. 항목이 되면, 처리할 수 있다. 처리할 수 있는 것만이 이곳에서 ‘현실’이다.


첫 열의 제목을 썼다. What. 오늘의 핵심 충돌을 한 줄로 요약하는 칸. 나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절차 합의 후의 추가 발언 요청이 시간 계획을 잠식함.” 두 번째 열. Red Flag. 다시 불붙을 문장들. 나는 방금 전 들었던 ‘just for clarification’ 같은 말들을 떠올렸다. 말은 무해한 얼굴로 들어와, 기록 속에서 칼이 된다. “clarification,” “re-open,” “for the record.” 나는 그 옆에 작은 표시를 찍었다. 이 문장은 다시 불붙는다.


세 번째 열. Who. 이름 대신 역할로 적었다. ‘G77 코디네이터’, ‘EU 조정’, ‘주요 분담국 대표’, ‘사무국 예산 담당’. 제5위원회에서 개인은 잠깐이다. 역할만이 남는다. 네 번째 열. When. 마감 시각을 ‘정치적으로 무난한 시간’에 박아 넣었다. 너무 이르면 상대가 방어하고, 너무 늦으면 기록이 굳는다. “내일 11:30, 커피 브레이크 전.” 다섯 번째 열. Next Step. 동사로 끝내야 한다. “문안 대체안 2개 준비.” “우려 요지 확인.” “시간 계획 재확인.” 말은 동사가 될 때 움직인다.


나는 문서 기호를 적는 버릇이 있다. A/71/717 같은 숫자는 이 건물의 혈관이다. 그 숫자를 알고 있으면 어디서든 길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숫자도 적었다. 5.397. 누군가는 5.4라고 부르며 손쉽게 줄여 말하지만, 그 소수점 아래에는 각국의 채용 동결, 출장 취소, ‘컨설턴트’라는 이름의 작은 전쟁들이 매달려 있다. “전기(2016–2017) 대비 5퍼센트 삭감”이라는 문장은 회의장에서는 건조했지만, 복도에서는 칼날처럼 들렸다. 게다가 ‘연도별 예산 주기’라는 시험적 전환은 합의문 한 줄로 끝나는 변화가 아니라, 다음 해마다 반복되는 습관이 된다.


메일 알림이 한 번 울렸다. ‘Follow-up on agreed language.’ 제목만으로도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게 ‘미스터 코디네이터’를 붙이던 사람들 중 한 명. 나는 메일을 열지 않았다. 먼저 표의 한 칸을 더 채웠다. “합의문 문장 순서—주어가 먼저냐, 조건절이 먼저냐?” 이런 것은 겉으로는 문법이지만, 실은 권력이다. 문장 순서는 역사 해석의 순서다.


문이 다시 열리며 사무국 직원이 얼굴만 내밀었다. 아까 내 옆에서 대기 명단을 관리하던 직원이었다.


“코디네이터님, 오늘 발언 순서 때문에 두 대표단이 기록에 ‘절차적 유감’을 남길 수 있답니다. Reportuer가 메모를 요청했습니다.”


“Reportuer에게 이렇게 전해 주세요.” 나는 화면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합의한 시간 계획과 대기 명단 원칙을 그대로 적용했다—그게 전부라고요.”


“문장으로요?”


“문장으로.” 나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결국 문장만 살아남으니까요.”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대표부 번호였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마무리됐습니다. 합의로 갔습니다.”


“표결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다만 추가 발언 요청이 오늘의 변수였습니다. 시간이 아니라 공정성의 체감이 흔들렸습니다. 다음 비공식 전에 문안 두 개 준비하겠습니다.”


“누굴 먼저 만나?”


“G77과 EU부터요. 그리고 그(모굴) 대표도요. 오늘 규칙을 편들었습니다.”


대사는 짧게 말했다. “그럼 그쪽을 동료로 만들어라.”


통화가 끊기자, 복사기와 청소 카트의 소음이 다시 들렸다. 나는 표를 내려다봤다. 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고, 시작은 언제나 정리표로부터 온다.


나는 메일을 열어 첫 줄을 읽고, 다시 표로 돌아왔다. 메일은 늘 ‘정중한 압박’으로 시작한다. “We would appreciate…” 같은 말들. 그 뒤에는 각자의 국내 보고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국내 보고 뒤에는 다음 라운드의 협상 태도가 붙는다.


나는 카드의 촉감을 떠올렸다. 그는 내게 ‘먼저 쳐 달라’고 했다.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신호였다. 규칙을 아는 사람끼리는 싸울 수 있고, 싸운 뒤에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절차를 믿는다는 것은, 상대를 ‘다음 라운드의 동료’로 남겨 둔다는 뜻이다.


창밖으로 이스트 리버 쪽의 회색빛이 보였다. 겨울의 뉴욕은 늘 스스로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다시 화면을 본다. 커서는 표의 빈칸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방금 멈춘 스톱워치가 다른 방식으로 계속 뛰는 것처럼.


나는 커서를 다음 행으로 옮기며, 아직 적지 않은 이름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미 꺼졌지만, 그들의 문장은 내 표 안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사진 출처: 개인소장)


Disclaimer - This post was prepared by Sang Yeob Kim in his personal capacity. The opinions expressed in this article are the author's own and do not reflect the view of his empl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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