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구·다치바나 올레
제1화 친절한 사람들, 불친절한 길
― 신구·다치바나 올레
<가깝지만 가까워지지 않는 나라>
김해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수평을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나 잤을까. 착륙을 준비한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시간은 40분 남짓, 제주도에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국으로 간다는 긴장감을 느끼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바다 하나가 놓여 있다. 오래전부터 그 바다를 건너 사람과 물자가 오갔고, 언어와 기술, 종교와 예술이 서로의 삶에 흔적을 남겼다. 바다는 두 나라를 갈라놓은 경계이면서 문명이 건너다닌 통로이기도 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는 비행기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지도를 접듯 두 나라 사이의 역사를 접을 수는 없다.
오랜 교류의 시간에는 배움과 협력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침략과 식민 지배의 역사, 그로 인해 생겨난 상처와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들도 함께 남아 있다. 일본의 거리에서 친절한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역사의 상처를 기억한다고 해서 눈앞의 한 사람에게까지 마음을 닫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집단의 역사를 기억하는 일과 개별 인간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일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둘을 함께 품는 태도가 이웃 나라를 이해하는 출발점일 것이다.
후쿠오카공항에서 처음 만난 일본은 친절했다. 입국신고와 세관신고를 위해 서류를 작성하는 동안 곳곳에서 한국어를 하는 안내요원들이 도움을 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머뭇거리면 먼저 다가왔고, 질문에는 차근차근 대답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과정만 놓고 보면 출국할 때의 김해공항보다 오히려 더 친절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금을 찾고 교통카드를 구입하기 위해 안내데스크에 도움을 청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직원은 앉은자리에서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리키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몇 마디 말로 설명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더라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굳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행동이었지만 낯선 여행자에게는 그 한 걸음이 방문한 나라에 대한 첫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
친절은 반드시 특별한 호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불편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움직이는 일, 그 정도의 배려만으로도 낯선 공간은 한결 편안해진다. 공항 직원의 행동이 직업적 훈련에서 비롯된 것인지 개인의 성품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친절이 이 나라의 어두운 역사를 어느 정도 덮어주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날 오후, 길에서는 조금 다른 경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을 견디는 나무, 길을 찾는 사람>
2차 규슈올레의 첫 코스는 신구·다치바나다. 기존 후쿠오카·신구 코스가 개발공사 등의 이유로 2025년 8월 31일 폐쇄된 뒤 노선을 크게 바꾸어 같은 해 10월 1일 다시 문을 연 길이다. 현장의 커다란 안내판에도 이전 코스의 폐쇄와 새로운 코스의 개장을 알리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
출발점인 니시테츠 신구역을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가 열렸다. 신구해안이었다. 짙푸른 바다 위로 흰 구름이 낮게 떠 있었고, 넓은 모래사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방파제 너머로 파도가 흰 선을 만들며 밀려왔다. 해변 한쪽에는 규슈 올레의 붉은 간세가 서 있었다. 목적지까지 8킬로미터가 남았다는 표지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여러 번 교통수단을 갈아타고 찾아온 길이 그제야 시작되었다.
해변을 지나자 소나무 숲이 이어졌다. 입구의 안내판에는 ‘신구의 해안보안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으로부터 주택과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해 조성하고 관리해 온 숲이라는 뜻이다. 나무들은 반듯하게 하늘을 향하지 않았다. 어떤 나무는 옆으로 몸을 틀었고, 어떤 나무는 허리를 굽혔다. 서로 기대듯 가지를 뻗은 나무도 있었다. 오랫동안 바닷바람을 견딘 시간이 나무의 몸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잘게 부서져 들어오고 발밑에는 솔잎이 두껍게 깔렸다.
나무들은 바람을 피할 수 없었기에 바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익혔다. 곧게 자라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놓인 자리에서 살아남을 방향을 찾아온 것이다. 뒤틀린 줄기와 휘어진 가지는 결핍의 흔적이 아니라 오랜 생존의 기록이다. 우리가 흔히 반듯하고 곧은 것을 건강한 성장의 모습으로 여기지만, 자연은 하나의 형태만을 올바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버티는 나무도 있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기울여 살아가는 나무도 있다.
사람들은 마을을 보호하려고 나무를 심었고, 나무들은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의 삶을 지켜왔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 것인지, 자연이 인간을 보호한 것인지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다.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관리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이 숲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을과 나무의 숲은 서로에게 기대어 산다.
숲을 벗어나 마을로 들어서자 길이 달라졌다. 규슈 올레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지도와 현장의 표식이 서로 맞지 않았다. 더 난감한 것은 마을의 갈림길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표식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지도를 보고 한쪽 길로 들어갔다가 아무래도 이상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트레커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알바’를 하루에도 몇 차례 했다.
그런데 마을을 벗어나 다시 숲으로 들어서자, 숲에는 20미터 남짓한 간격으로 올레 리본과 표식이 나타났다. 갈림길도 없는 외길에서 앞의 리본이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다음 리본이 보였다. 길을 잃으려고 해도 잃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작 표시가 필요한 마을에는 없고, 길이 하나뿐인 숲에는 넘쳐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마을과 도시에 들어서도 노란 화살표는 끊이지 않았다. 길바닥과 돌, 담벼락, 전봇대, 골목 모퉁이까지 순례자가 길을 잃을 만한 곳이면 누군가 먼저 표시를 남겨두었다. 순례자는 그 화살표를 따라 낯선 마을을 통과하고, 마을은 순례자를 받아들이며 길의 일부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순례의 역사에는 길을 걷는 사람과 그 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가 함께 쌓여있다.
산티아고의 노란 화살표는 단순한 방향 표시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길을 걸었던 사람이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남긴 안내이자, 그 길을 받아들인 마을의 오랜 약속이다. 길을 만든 사람이 그 자리에 없어도 여행자는 화살표 하나를 통해 누군가의 배려를 만난다. 길에서의 신뢰는 이렇게 얼굴을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진다.
지도 위에 선을 긋는다고 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그 선을 따라 걸어야 하고, 그 사람이 길을 잃지 않도록 누군가는 표시를 남겨야 한다. 무엇보다 그 길이 통과하는 마을과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길을 걷는 순례자에게 건네는 ‘부엔 카미노~’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약속이자 배려이고 동행이다.
<아무도 걷지 않는 길에서>
하루 종일 신구·다치바나 올레를 걸었지만 우리와 같은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앞서 가는 사람도 없었고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도 없었다. 아내와 나, 둘 뿐이었다. 지난 1차 올레와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국 여행객들조차 없다. 사실 규슈올레는 불편하긴 하다.
찾아오는 길부터 간단하지 않았다. 후쿠오카공항에 도착해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국내선 터미널로 이동해야 지하철을 탈 수 있다. 그곳에서 지하철을 탄 뒤 다시 두 차례 교통수단을 갈아타야 니시테츠 신구역에 도착한다. 걷기가 끝난 뒤에도 사정은 비슷했다. 종점에서 다음 날 오시마로 이동하기 좋은 와지로 근처 숙소까지 가려면 버스와 철도를 다시 이어 타야 했다. 자동차가 없다면 올레를 걷는 시간만큼이나 출발점과 종점을 연결하는 일이 여행의 일부가 되는 코스다.
여행자의 걷기는 출발점에서 시작되지만, 그곳에 도착하기까지의 이동도 길의 일부다. 낯선 역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시간표를 살피고, 짐을 들고 버스에 오르는 과정이 쌓여 비로소 첫걸음에 닿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던 작은 마을들은 오랜 세월 순례자가 도착하고 떠나는 일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여왔다. 숙소와 식당, 식수대와 안내표식이 그 관계 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신구·다치바나 코스는 새로 개편된 지 아직 오래되지 않았다. 여행자의 발걸음이 마을의 일상과 충분히 어우러지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마을의 갈림길에서 몇 차례 헤매는 동안 엉뚱한 의문도 생겼다. 혹시 주민들에게 낯선 트레커들이 집 앞 골목을 지나가는 일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여행자에게는 아름다운 마을길이 누군가에게는 매일 드나드는 집 앞의 생활공간이다. 지도를 확인하느라 오래 서 있거나 사유지와 공공의 경계를 헷갈리는 일이 주민들에게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 주민들에게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표식이 부족한 이유가 관리상의 문제인지, 설치 장소에 관한 협의 때문인지, 다른 사정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차례 길을 잃었다는 경험만으로 주민들의 태도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다. 불편함은 분명 내가 겪은 일이지만, 그 원인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내가 가진 선입견이 끼어들기 쉽다.
공항에서 만난 직원의 친절은 분명 고마운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그 한 사람의 행동으로 일본인 모두의 성품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마을에서 길을 잃은 경험 역시 분명 불편했지만, 그것만으로 주민들이 낯선 사람을 반기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슬롯 안에는 친절한 사람과 무심한 사람이 함께 살고, 잘 정비된 공간과 아직 손길이 필요한 길이 공존한다. 그 복잡함을 하나의 성격으로 묶어 설명하려는 순간, 우리는 눈앞의 사람과 장소를 충분히 보지 못하게 된다.
걷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잃은 바카라임을 모두 여행자에게 돌릴 수는 없지만, 길이 불편하다고 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까지 불친절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여행자는 잠시 지나가지만 주민은 그곳에서 매일 살아간다. 서로 다른 두 생활이 만나는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일방적인 친절의 요구보다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려는 노력일 것이다.
제주올레와 자매길이고 심사과정에도 참여한다고 하니, 서로의 길을 살펴보고 확인하는 시간이 있기를 바라본다.
<숲은 다시 길을 열었다>
코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길은 다시 산으로 파고들었다. 하라가미 대사당(原上大師堂) 부근에 이르자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굵은 대나무들이 거의 수직으로 솟아 하늘을 가렸고, 그 사이로 오래된 삼나무와 활엽수가 섞여 있었다. 바닥에는 마른 대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여 발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길가에는 작은 석불들이 한 줄로 앉아 있었다. 손 모양도 표정도 조금씩 달랐고, 오랜 세월 비와 습기를 견딘 돌의 표면에는 희미한 이끼가 내려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와 주택가를 걸었다는 사실이 낯설 만큼 숲은 깊고 조용했다. 돌부처들은 오랫동안 이 길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기도를 올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사람이 드물어진 길에도 누군가의 염원은 돌의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마쓰오 산(松尾山)을 넘는 길에서는 경사가 제법 가팔라졌다. 대나무는 위로 곧게 뻗었지만 길은 그렇지 않았다. 좁은 흙길이 산의 비탈을 따라 휘어졌고, 능선 하나를 넘었다 싶으면 다시 오르막이 이어졌다. 이미 몇 차례 길을 잘못 들어 예정에 없던 걸음을 보탠 다리에는 마지막 오르막이 만만하지 않았다. 지도에서는 가까워 보이던 종점이 숲 속에서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 구간이 이날 걸었던 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다. 바다에서 출발한 길이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과 도로를 통과하고, 마지막에는 대나무와 오래된 나무들이 빽빽한 산속으로 사람을 데려다 놓았다. 해변의 소나무들은 바람을 견디며 몸을 비틀었고, 산속의 대나무들은 서로 비슷한 높이로 곧게 솟아 있었다. 나무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달랐다. 같은 하늘 아래서도 자신이 놓인 자리와 맞닥뜨린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깊은 숲에서는 한 번도 길을 잃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는 몇 차례 헤맸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 숲에서는 표식을 따라 수월하게 걸었다. 물론 숲이 스스로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리본을 매달고 갈림길에 표시를 남긴 것도 결국 사람의 손이었다. 다만 그 손길이 숲과 마을에 서로 다르게 닿아 있었을 뿐이다.
산을 넘어 내려오자 오늘의 종점인 코민카 미칸이 나타났다. 그러나 문은 닫혀 있었다. 하필 수요일, 정기휴무일이었다. 몇 번의 알바 끝에 마지막 산까지 넘어 도착했는데 우리를 맞아준 것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조금 허탈했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에게는 긴 걸음을 마친 특별한 날이지만, 그들에게는 정해진 일상의 하루다. 여행자는 자신의 일정에 맞춰 세상이 움직여주기를 은근히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장소는 여행자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이 이어지는 공간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여행이다.
마을버스를 타려고 섰다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네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았다. 공항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안내해 주던 직원만큼이나 친절했다. 숲 속에 매달린 리본 하나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시간을 조금 덜어주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먼저 움직였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반대로 표식이 없는 갈림길에서는 그 작은 배려의 부재가 얼마나 큰 불편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만난 사람들과 길을 친절과 불친절이라는 두 단어로만 나누고 싶지는 않다. 길을 잃었던 순간의 짜증도, 공항에서 받은 도움에 대한 고마움도 모두 실제 경험이다. 어느 한쪽을 지운다고 다른 쪽이 더 진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어긋나는 경험을 함께 간직하면서 성급한 결론을 미루는 일, 그것이 낯선 세계를 대하는 조금 더 성숙한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여행지에 도착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오래전에 배운 역사와 살아오며 쌓인 감정, 미리 만들어놓은 기대와 판단을 함께 가져간다. 때로는 그 기억이 눈앞의 풍경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지만, 때로는 아직 만나보지 않은 사람에게 미리 이름표를 붙이게도 한다. 낯선 길에서 헤매는 일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익숙한 판단 안에서 길을 잃는 일이다.
두 나라 사이의 바다를 건너는 데는 40분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오래된 시선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까운 나라는 있어도, 단순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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