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안전감이 무너질 때 에이스부터 떠난다
얼마 전 온라인 게임생활을 오래 해온 친구들과 저녁을 먹다가 조금 흥미로운 질문이 나왔다. “너네 회사에서 같이 일하기 제일 힘든 유형이 누구냐?”라는 물음이었다. 예전 같으면 다들 “일 못해서 일 두 번 하게 만드는 사람”이나 “손이 느려서 내 퇴근 시간까지 발목 잡는 사람”을 먼저 꼽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차라리 일을 못하면 가르치거나 일을 안 주면 되는데, 진짜 위험한 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면서 조직 분위기나 팀원들 멘탈을 뒤에서 무너뜨리는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슬롯 초년생일 때 생각한 엑스맨과 연차가 꽤 쌓인 지금의 엑스맨 정의가 달라진 것이다.
나 역시 여러 조직을 거치며 다양한 사람들과 일해 보니 이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됐다. 온라인 게임생활 초반에는 업무 스킬이 부족하거나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조직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다. 실무 능력이 부족하면 당장 눈앞의 과제에 차질이 생기고, 그 짐이 주변 동료들에게 분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조직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얼른 1인분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조급해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회사의 수많은 프로젝트와 조직의 흥망성쇠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일을 못하는 것은 교육이나 시스템, 적절한 업무 배분을 통해 일정 부분 보완이 가능하다. 하지만 특정 성향이나 태도에서 비롯되는 위험은 눈에 잘 띄지 않으면서도 조직의 혈관을 천천히 막히게 만든다. 온라인 게임이라는 공간에서 진짜 경계해야 할 위험은 실무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조직의 신뢰와 동기를 뿌리째 흔드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일을 못하는 사람보다 조직에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걸까. 현장에서 경험한 위험한 유형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바카라임 회피형’이다. 이 유형은 평소에는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고 포장 능력도 뛰어나서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프로젝트에 예측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하거나 결과에 대한 바카라임을 질 순간이 오면 가장 먼저 발을 뺀다. “그건 A 대리가 확인하기로 했던 건데요”, “저는 그때 분명히 반대 의견을 냈었습니다”라며 모든 공은 자신이 가져가고, 과오는 팀원이나 다른 부서로 돌린다. 이런 사람이 조직에 있으면 팀원들은 도전적인 일을 시도하기보다 ‘어떻게 해야 나중에 욕을 안 먹을까’를 먼저 계산하게 된다. 실패에 대한 안전망이 사라진 조직에서는 누구도 먼저 손을 들지 않게 되고, 결국 조직 전체가 몸을 사리는 무기력증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는 ‘피해자형’이다. 늘 세상 모든 억울함을 혼자 짊어진 듯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회사나 상사, 동료들의 모든 결정과 피드백을 자신에 대한 공격이나 불공정한 처사로 받아들인다. 업무를 부여받아도 “왜 저한테만 이런 어려운 일을 주시죠?”, “저 사람만 편애하시는 것 같아요”라며 피해의식을 드러낸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탕비실이나 개인적인 대화 자리에서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부정적인 기운으로 물들인다는 점이다. 건강한 비판은 조직을 발전시키지만, 습관적인 피해의식은 팀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서로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피해자형과 함께 일하다 보면 동료들은 업무 자체보다 그 사람의 기분을 맞춰주는 데 더 많은 에너지와 감정을 소모하게 된다.
세 번째는 ‘정치형’이다. 이들은 실무의 본질이나 성과 자체보다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누구 라인에 서야 하는가’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정작 일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상사의 기분을 맞추거나 사내 정보망을 독점하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자신이 직접 일을 해서 가치를 만들기보다, 남이 해놓은 성과에 슬그머니 이름만 얹거나 반대로 라이벌 관계에 있는 동료의 작은 실수를 부풀려 인격적인 흠집을 내는 일에 능숙하다. 정치형이 인정받고 승진하는 조직에서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실무자들이 가장 먼저 지치고 떠나게 된다. 일의 본질이 아닌 사내 정치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순간, 그 회사의 경쟁력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성장 거부형’이다. “예전부터 다 이렇게 해왔는데요”, “굳이 일을 만들어서 할 필요가 있나요?”라며 새로운 시도나 변화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유형이다. 시대가 바뀌고 시장 환경이 급변하는데도 기존의 익숙한 방식만 고집하며, 효율적인 프로세스를 도입하려는 동료의 노력을 ‘유별난 짓’으로 치부한다. 단순히 본인이 변화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새로 입사한 열정적인 동료나 후배들의 의욕까지 꺾어놓는다. 이들은 조직의 평균 수준을 끌어내리고 고인 물로 만드는 주범이다.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해야 하는 회사 입장에서, 성장을 거부하는 태도는 실무 스킬이 부족한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렇다면 회사는 왜 이런 위험한 유형들을 일찍 알아채고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걸까. 밖에서 볼 때는 “저런 사람은 빨리 정리를 하거나 다른 데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실제 회사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구글이 2012년부터 2015년까지 180여 개 팀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Project Aristotle)’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구글은 당초 IQ가 높고 스펙이 뛰어난 엘리트들을 모아놓은 팀이 최고의 성과를 낼 것이라 예상했으나, 조사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팀원 개개인의 역량이나 조합은 성과와 큰 상관이 없었고, 탁월한 성과를 내는 팀들의 독보적인 1위 비결은 바로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었다. 내가 실수를 하거나 무안한 질문을 던져도 조직이나 동료가 나를 매장하거나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구성원들은 비로소 리스크를 무릅쓰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며 최고의 성과를 만든다는 뜻이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위험한 유형들이 조직 내의 이 '심리적 안전감'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집요하게 파괴한다는 점이다. 바카라임 회피형은 솔직한 정직함을 위험 요소로 만들고, 피해자형은 건전한 피드백을 개인적 공격으로 왜곡하며, 정치형은 신뢰 대신 눈치 보기를 유도하고, 성장 거부형은 새로운 시도 자체를 비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럼에도 회사가 이들을 선뜻 처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위험성이 ‘평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회사 평가 체계는 매출이나 프로젝트 완료 여부 같은 정량적 성과 중심이다. 정치형이나 바카라임 회피형은 자신이 직접 실무를 쥐지 않더라도 남의 성과를 포장하거나 결과가 나오는 시점에 능숙하게 숟가락을 얹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지표상으로는 '보통 이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사팀 눈에는 잘 걸러지지 않는다.
여기에 한국 온라인 게임 문화 특유의 ‘갈등 회피 성향’과 ‘제도적 한계’도 더해진다. 태도에 문제가 있는 직원을 직접 면담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 부담스럽다 보니, 리더들은 법적 리스크를 피하려 그저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일만 주며 방치한다. 그 결과, 구글이 밝혀낸 ‘심리적 안전감’은 서서히 무너지고, 그 여파로 묵묵히 위험을 감수하며 일하던 에이스들이 가장 먼저 회의감
을 느끼고 퇴사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회사는 그저 구조적 한계 뒤에 숨어 이들의 해악을 방관하고 있어야만 할까. 당연히 아니다. 이들을 방치하는 순간 회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즉,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성실한 인재들이 먼저 지쳐 떠나는 비극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조직이 진정으로 ‘심리적 안전감’을 지키고 선량한 직원들을 보호하고 싶다면, 평가와 관리의 관점 자체를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첫째, 점수 퍼주기식 평가를 넘어선 ‘행동 증거 중심의 동료 피드백’이다. 사실 현장에서 동료 피드백(Peer Review)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제도다. 친분 관계에 따라 점수를 주고받는 '인기투표'로 변질되거나, 사내 파벌 갈등으로 서로를 모함하는 도구로 악용되는 부작용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동료 피드백을 연봉이나 승진 점수에 직접 합산하는 방식은 매우 위험하다.
대신 5점 척도 같은 평가 점수는 배제하고, "실제 협업 과정에서 보여준 구체적인 행동 팩트"만을 적게 해야 한다. 바카라임 전가나 공 숟가락 얹기 같은 구체적인 정황 사례를 기록하게 하고, 피평가자가 자주 안 부딪히는 동료까지 지정하는 식의 필터링 장치가 필수적이다. 리더는 동료들의 피드백을 단칼에 평가 점수로 쓰는 것이 아니라, 상사의 눈에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의 맥락을 포착하고 1:1 면담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이상 신호 감지 안테나'로만 활용해야 한다.
둘째, 업무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여 바카라임과 공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카라임 회피형은 문제가 생겼을 때의 모호함을 먹고 자라고, 정치형은 타인의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가져가는 정보의 격차를 이용한다. 따라서 조직은 업무의 R&R(역할과 바카라임)과 의사결정 과정을 누구나 볼 수 있는 협업 시스템 위로 올려놓아야 한다.
프로젝트 시작부터 담당자, 변경 이력, 최종 의사결정자가 투명하게 기록되는 문화에서는 누군가에게 바카라임을 전가하거나 공을 훔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이는 무임승차자를 걸러내는 시스템적 장치이자, 동시에 묵묵히 제 몫을 다한 성실한 직원의 기여도를 온전히 증명해 주는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 된다.
셋째, 리더의 '1:1 면담(One-on-One)'을 정성적 멘탈 케어 채널로 가동하는 것이다. 피해자형이나 정치형이 퍼뜨리는 부정적인 기운은 대개 탕비실이나 개인 메신저 같은 사각지대에서 은밀하게 퍼진다. 피해를 입는 성실한 직원들은 보복이나 유별난 사람으로 찍힐까 봐 공식적인 자리에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다.
리더는 단순히 "진행 중인 업무 현황"만 묻는 보고식 면담을 넘어, "요즘 협업 과정에서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요인이 있느냐"를 정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신호를 조기에 포착하고 조치하는 것, 그것이 바로 리더가 성실한 구성원에게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괜찮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특히 리더의 성품과 역할이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차장이 되고 나서 나 역시 회사의 다양한 사람들과 조직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심리적 안전감을 주는 동료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조직의 안전망을 갉아먹는 위험한 유형 중 하나는 아닌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온라인 게임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업무 능력이 떨어지는 시기를 겪을 수 있다. 새로운 직무를 맡았거나,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를 연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무 능력 부족은 배움에 대한 열정과 올바른 태도가 있다면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경우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주는 진짜 교훈도 이것이다. 완벽한 능력자가 모인 팀보다, 실수해도 품어줄 수 있는 안전한 문화 속에서 비로소 개인의 잠재력이 폭발한다는 사실이다.
회사는 단순히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곳만은 아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자, 수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터전이다. 회사가 모든 위험 요소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바꿀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떤 태도가 조직을 병들게 하는지 알고 있다면 스스로를 지키고 팀의 분위기를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만약 지금 당신의 옆자리에 실무는 조금 부족하지만 배움을 주저하지 않고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후배가 있다면, “실수해도 괜찮다”는 확신을 주는 따뜻한 조언 한마디를 건네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반대로 겉은 화려하지만 은근히 남에게 바카라임을 전가하고 심리적 안전감을 훼손하는 동료가 있다면, 일정한 거리를 두며 내 페이스와 멘탈을 지키는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결국 온라인 게임생활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우리가 오래도록 달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화려한 임시방편의 정치나 포장이 아니라, 일에 대한 진정성과 동료들과 쌓아 올린 묵직한 신뢰일 테니까.
*사진 출처: https://pin.it/7jS9DO6B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