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선란 작가의 『모우어』를 읽고
어린 시절 나는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다.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이나 현실과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일은 유일한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다. 특히 해리포터는 나의 매일매일을 새롭게 만들었다. (90년 대생들 중에 해리포터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쉬울 정도지만) 계단 아래 다른 공간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믿고, 내가 너무 하찮게 느껴진 날에도 나는 무언가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길을 걷다가 마주친 새에게 윙크를 하며 뜬금없이 안부를 전하고, 나뭇가지를 주워 주문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나는 마법 같은 상황을 간절하게 원했다. 지옥 같은 이 상황에서, 전혀 바뀔 것 같지 않은 미래가 단 한순간의 마법으로 뒤바뀌길. 계단 아래 찬장에서 살던 존재가 모두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것처럼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존재가 되길. 그것이 내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바닥에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다른 곳으로 나를 데려가달라고. 마음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세상으로,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여 있을 수 있는 세상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세상으로, 누군가의 죽음이 희화화 되지 않는 세상으로, 제발 나를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어른이 되어 온몸으로 통과해 온 미래는 환상적이지도 마법 같지도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잔인했으며 상상과 아주 달랐다. 속으로 아무리 주문과 저주를 내뱉어도 세상에는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고, 데미지는 오히려 나에게 돌아왔다. 처음에는 절규하다가 허탈해하다가 속으로 삼키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모우어』에 실린 「쿠쉬룩」의 인공지능 발락이 말했듯, 미래는 불안하고 불확실하고 절망적이었다. 나를 그럴싸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도 없었고, 나를 원하는 지점까지 보내주는 마법 빗자루도 없었다. 휘몰아치는 폭풍 한가운데 홀로 서서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어느 순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고, 손에 닿지도 않는 것들을 갈망하는 것들은 나를 쉽게 갉아먹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잃었고, 나에 대해 알려고 하는 의지를 잃었고, 세상과 나를 연결해 주던 끈을 잃어버렸다. 그냥 나는 나의 길에, 나의 미래에 확신을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너는 잘하고 있다고, 분명 다른 결말도 있다고 누군가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럼에도 나는 문학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보았다. 『모우어』의 첫 번째 수록작 「얼지 않는 호수」에서는 소중했던 친구의 말라붙은 심장을 품에 안은 아이 '야자'가 나온다. 야자는 친구의 심장을 그 영혼에게라도 쥐여주려고 '얼지 않는 호수'를 향해 먼 길을 떠난다. 나는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모든 것이 다 얼어버린 세상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야자처럼 나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용기 있게 걸어가고 싶어서였다.
상실을 안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들은 어디에서 저런 힘을 얻는 걸까? 잃어버린 누군가를 찾고 헤매고 다시 만나는 바카라 속의 인물들을 보면서 결국 나는 용기가 없어서 괴로운 순간들에서 벗어나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제자리에서 가만히 서서 모든 것이 마법처럼 순식간에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이제 그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다른 은하계로 날려버린 지구의 결말이.
- p.30 「얼지 않는 호수」
바카라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어딘가로 날려버렸을 내 미래가. 그 미래를 다시 붙잡아 오면 어떻게 될까. 처음부터 리셋할 순 없어도 수정은 가능할까. 그래서 발락의 말처럼 통계적으로 불안한 미래라 할지라도 또 뛰어들 마음만 먹는다면, 다시 은하계처럼 아득한 곳으로 출발할 힘이 생길까.
이제 진짜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상상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나의 결말은 어떤 모습일 것 같은가? 나는 어떤 미래에서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을 던진 순간 미래는 마법을 꿈꾸던 옛날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가변적인 속성을 부여받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곤 어딘가에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언젠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 믿으며, 꽁꽁 언 호수 위에서, 끝나지 않는 사막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