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자본주의 주택시장의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동산 투기와 가장 높은 자가 보유 열망을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도시 모델은 슬롯주의 국가들이 가장 열광적으로 수용한 르코르뷔지에의 것이다. 이 역설이 한국 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르코르뷔지에 모델이란
르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단순하다. 기존 도시 조직을 전면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고층 탑상형 아파트 단지를 세운다. 건폐율은 극도로 낮추고, 남은 땅 대부분을 녹지와 도로로 채운다. 주거·업무·상업 기능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자동차 중심의 교통 체계를 구축한다.
이 모델의 정치적 상상력은 명확하다. 개인의 삶을 표준화된 주거 단위 속에 배열하고, 나머지 공간은 공동체에 귀속시킨다. 그가 이 구상을 발전시킬 때 영감의 원천 중 하나는 모스크바였고, 그의 바카라 《빛나는 도시》는 소련의 집단주의적 도시 이념과 공명했다. 유럽은 이 모델을 구도심에 적용하는 것을 끝내 거부했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르코르뷔지에 모델은 단순한 권위주의적 환상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유럽의 산업도시는 극심한 과밀과 비위생, 노동자 주거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근대주의 건축가들은 낡은 도시 구조를 해체하고, 빛과 공기, 녹지를 갖춘 새로운 주거 환경을 대량 공급하는 것을 슬롯 개혁의 과제로 여겼다. 르코르뷔지에가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외칠 정도로 노동자 계층의 주택 문제는 절박한 시대였다.
르코르뷔지에 본인의 정치적 성향은 복잡하고 논쟁적이다. 그러나 그의 도시 모델이 집단주의적 도시계획과 구조적으로 친화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이 모델은 전후 소련과 동유럽 슬롯주의 국가들에서 가장 충실하게 구현됐다. 반면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은 기존 도시 조직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다.
르코르뷔지에 모델이 한국 신도시와 재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이미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아파트 공화국》(2007)에서 한국 아파트단지와 서구 현대건축운동의 관계를 분석했고, 건축가 유현준은 르코르뷔지에가 프랑스보다 한국에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축가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아파트 단지 담론과의 차이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아파트 그 자체가 아니다. 한국 슬롯에서 아파트를 둘러싼 담론은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아파트 공화국'론으로, 아파트 중심의 주거 문화와 부동산 투기 구조를 비판한다. 다른 하나는 '아파트 단지'론으로, 단지가 만들어내는 폐쇄성과 공동체 해체를 문제 삼는다. 박철수는 한국 아파트의 문화사를, 박인석은 단지화 전략의 문제를, 황두진은 무지개떡 건축이라는 대안적 도시 모델을 통해 각각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이들의 작업은 중요하지만, 이 글의 문제의식은 다른 층위에 있다. 아파트가 많다거나 단지가 폐쇄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공간 구조를 규율하는 모델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고층 탑상형 건물, 광대한 공유 녹지, 기능 분리, 자동차 중심 동선이라는 도시 설계 원리—이것이 숙의 없이 한국의 도시 표준이 된 과정을 묻는 것이다.
왜 한국은 이 모델을 선택했는가
한국이 르코르뷔지에 모델을 수용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압축 성장기의 대량 주택 공급 필요, 자동차 중심 근대화에 대한 선망, 재개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유리한 고층·저건폐율 구조, 국가 주도의 도시계획 체계가 서로 결합되어 있었다. 여기에 대형 건설사와 금융 시스템까지 결합하면서, 고층 대단지 모델은 가장 효율적인 도시 개발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이 효율성이 다른 도시 상상력을 밀어냈다는 점이다. 르코르뷔지에 모델은 단지 건축 이론이 아니라, 압축 성장기의 국가·건설사·금융 시스템이 가장 빠르게 도시를 확장할 수 있는 개발 공식이었다. 도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보다 얼마나 빠르게 공급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숙의 없이 선택된 모델
한국에서 르코르뷔지에 모델은 2기 신도시부터 사실상 국가 표준이 됐다. 2003년부터 본격화되어 2007년 첫 입주가 시작된 2기 신도시는 성남 판교, 화성 동탄, 김포 한강 등 수도권 11개소와 지방 2개소, 총 13개 사업지구에서 진행됐다. 진보 정권도, 보수 정권도 예외 없이 이 모델을 밀어붙였다.
서울시의 뉴타운(2002~2007)도 이 논리의 도심 버전이다. 르코르뷔지에가 1925년 부아쟁 계획으로 파리 구도심 전면 철거를 제안했으나 유럽 시민들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던 바로 그 논리를, 서울은 강북의 오래된 동네들에서 실행했다.
서울의 재개발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여의도, 강남, 목동 등 초기 서울의 대단지 개발 역시 르코르뷔지에가 『빛나는 도시』에서 제시한 근대주의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았지만, 최근의 신도시와 재개발처럼 대규모 철거와 초고층 중심 개발을 전제로 하지는 않았다.
르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한국은 도시개발 초기에 이미 『빛나는 도시』를 수용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부아쟁 계획을 연상시키는 더욱 급진적인 재개발 방식으로 나아갔다.
골목경제와 충돌하는 도시 모델
르코르뷔지에 모델의 가장 큰 문제는 경관이나 밀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도시의 경제 구조 자체를 바꾼다는 점이다. 저층 혼합용도 도시는 작은 상점, 생활 서비스, 작업 공간이 촘촘하게 공존하는 구조를 만든다. 반면 기능 분리형 대단지 도시는 상업 기능을 거대 상가와 쇼핑몰로 집중시키고, 생활권 내부의 자생적 경제 활동을 약화시킨다.
이 구조에서는 보행 기반의 골목경제와 지역 기반 창업이 살아남기 어렵다. 도시가 다양한 동네들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주거를 대량 수용하는 기계처럼 작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도시의 문제는 ‘동네’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르코르뷔지에 모델은 도시를 효율적으로 공급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작은 경제를 만들고 지역 문화를 축적하는 생활권 구조를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한광야가 『도시마을의 진화』에서 보여주듯, 세계의 강한 도시들은 거대한 단지가 아니라 혼합용도와 보행 중심 생활권이 살아 있는 ‘도시마을’ 위에서 성장해왔다. 한국 도시의 과제는 이제 ‘비동네의 동네화’다.
역설의 핵심
가장 자본주의적인 주택시장을 가진 나라가, 가장 집단주의적으로 구현된 도시 모델을 아무런 선택의 과정 없이 표준으로 삼았다. 이것이 한국 도시의 역설이다. 도시 모델은 이념이다. 어떤 도시를 짓느냐는 어떤 슬롯를 만드느냐의 문제다.
한국은 오랫동안 도시를 주택 공급과 부동산 개발의 대상으로 이해해왔다. 역사적 맥락으로 보면, 산업슬롯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슬롯가 산업슬롯에서 가장 효율적이었던 도시 모델을 탈산업화경제 시대에도 거의 수정 없이 반복해온 셈이다.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1990년대 이후 탈산업화경제에서는 도시의 역할이 달라졌다. 창조성, 관계, 라이프스타일, 지역 문화, 소규모 창업 생태계가 경제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고층 대단지와 기능 분리를 중심으로 한 산업슬롯형 도시 모델은 이제 한국 도시가 필요로 하는 동네, 상권, 창조 생태계를 만들기 어렵다. 그 선택을 숙의 없이 반복해온 대가를 우리는 지금 원도심 붕괴, 소상공인 몰락, 지역 공동체 해체라는 형태로 치르고 있다.
참고문헌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길혜연 옮김, 후마니타스, 2007
박철수, 《아파트: 공적 냉소와 사적 정열이 지배하는 슬롯》, 마티, 2013
박인석, 《아파트 한국슬롯: 단지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현암사, 2013
황두진, 《무지개떡 건축: 회색 도시의 미래》, 메디치미디어, 2015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을유문화사, 2015
한광야, 《도시마을의 진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