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갑질’ 말고 ‘을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든 말이니까.
‘을질’이란, 스스로 을이 되는 행동을 말한다. 상대가 나를 낮춘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부탁하지 않아도 “네, 그렇게 할게요!”라고 말하는 일. 회사를 나와 혼자 일하게 되면서, 나는 이 ‘을질’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어쩌면 회사에서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갑과 을’은 계약서 속 용어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갑질’, ‘을의 위치’의 그 갑과 을이다. 프리랜서가 되면서 누구에게 고용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내가 스스로 을이 되어 있었다. 일을 제안할 때도, 요청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괜히 내가 몸을 낮췄다.
‘을질’의 대표적인 유형 중 하나는 ‘무조건 오케이병’다.
상대가 무리한 요청을 해도, 일단 “네!” 하고 본다.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관계가 깨질 것만 같은니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걸 알지만, 습관처럼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를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결국 그 ‘괜찮아요’의 대가로 급하게 바뀐 일정과 늘어난 업무에 스스로 허덕인다.
‘을질’의 또 다른 유형은 ‘감사병’이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에도 “감사합니다.”를 열 번쯤 말한다. 물론 인사야 예의지만, 그 속에는 ‘제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될까요?’라는 위축된 마음이 묻어 있다. 공짜로 받는 돈이 아닌데도 돈 이야기가 나오면 자동으로 자세가 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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