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도 끌어당김도 아니다!
박해영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내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꽤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의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난 뒤, 나는 한동안 '결핍'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결핍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결핍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버림받지 않으려는 집착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타인을 통제하고, 누군가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또 누군가는 자신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상대를 밀어낸다.
사람들의 행동을 하나씩 들여다보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행동에도 마치 수학 공식처럼 일정한 패턴이 있는 것은 아닐까?
A라는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결핍을 보면 된다. B라는 사람이 왜 저렇게 나르시시스트적인 행동을 하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린 시절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람을 분석하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 내가 반복해서 선택하는 것들, 어떤 상황에서 유독 화가 나고 불안해지는 이유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나는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과거의 경험과 결핍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반복해서 선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을 분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분석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나를 바꾸는 방법을 찾는 것.
내가 처음 발견한 방법은 '관찰자 모드'였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곧바로 '나'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난다. 그러면 '나는 화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대신, '지금 내 안에서 화라는 감정이 올라오고 있구나.'라고 바라본다.
불안한 생각이 떠오르면, '나는 불안하다'가 아니라 '지금 내 머릿속에 불안한 생각이 하나 들어왔구나.'라고 바라본다.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방법은 내게 상당히 큰 자유를 주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생각이 아니었고,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도 아니었다. 나는 생각을 바라볼 수 있었고, 감정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을 바라보는 '나'는 그것들과 조금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연극의 등장인물이면서 동시에 그 연극을 바라보는 관객이 될 수 있었다.
괴로운 일이 생겨도, '이것은 나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삶에 휩쓸리지 않고 조금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나는 삶에서 한 발 떨어지는 데 익숙해졌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일까?
그때 바샤르를 알게 되었다.
바샤르가 이야기하는 '충만'이라는 개념은 내 삶의 방향을 다시 바꾸었다.
이미 다 가졌다고 생각하기.
미래에 원하는 삶을 지금 살아보기.
똑같이 살 수 없다면 일부라도 그렇게 살아보기.
내가 설레는 것을 선택하기.
나는 이 생각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행복해지면'이 아니라 지금 행복해지는 것.
'돈을 많이 벌면'이 아니라 지금 내가 가진 것 안에서 풍요를 느끼는 것.
'원하는 삶을 살게 되면'이 아니라 지금 그 삶의 일부를 살아보는 것.
삶이 실제로 달라졌다. 무언가를 더 많이 얻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삶을 바라보는 기본값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부족함에서 충만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나는 매 순간 충만해야 하는가?
화가 나도 긍정적으로 바꾸어야 할까?
불안해도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라고 믿어야 할까?
슬퍼도 행복한 감정을 선택해야 할까?
관찰자 모드로 감정과 거리를 두는 것도, 충만 모드로 감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관찰자 모드는 감정과 나를 분리한다. 충만 모드는 감정을 더 좋은 상태로 바꾸려고 한다. 둘 다 내 삶을 변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했다.
나는 가끔 이 세계가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우주가 존재하고, 지구가 존재하고, 생명이 태어나고, 그 생명체 중 하나인 인간이 자기 자신과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하다.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누군가의 창조인지, 우리가 홀로그램 속에 존재하는지, 시뮬레이션 속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이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왜 만들었을까?
그리고 내가 왜 여기 태어났을까?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답을 하나 생각하게 되었다.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우리가 이 세계에 온 이유가 무엇이든,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살아보는 것. 느껴보는 것. 경험하는 것.
기뻐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실망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삶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죽은 뒤 영혼으로 돌아가든,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든, 플레이어로 돌아가든, 혹은 아무것도 남지 않든 상관없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이 3차원의 세계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진 이 몸과 감각으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경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삶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내가 삶을 선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예전의 나는 괴로운 상황이 생기면 그것을 없애려고 했다.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으면 걱정했다. 학원이 잘되지 않으면 불안했다. 돈에 대한 걱정이 생기면 그 걱정을 없애려고 했다. 가족과 갈등이 생기면 화가 났고, 그 화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의 나는 끊임없이 삶을 수정하려고 했다. 관찰자 모드로 삶에서 한 발 떨어지기도 했고, 충만 모드로 더 나은 현실을 만들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삶을 바라보는 질문이 달라졌다.
'이 상황을 어떻게 없앨까?'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이 때문에 걱정된다. 그러면 걱정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는구나.'
그 불안과 답답함을 느껴본다.
돈 때문에 불안하다. 그러면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지금 돈 때문에 불안하구나.'
그 불안을 있는 그대로 느껴본다.
아내와 다툰다. 그러면 '나는 깨달은 사람이니 화를 내면 안 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서운하면 서운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본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며 행복하다면, 그 행복도 온전히 느낀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다리가 힘차게 페달을 돌리고, 속도가 올라가고, 몸이 가벼워지는 그 순간을 그대로 경험한다.
나는 이제 행복한 감정만 선택하지 않는다. 슬픔도, 불안도, 분노도, 기쁨도, 설렘도 모두 삶이 내게 주는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기로 하자 오히려 감정이 나를 오래 붙잡지 않았다.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아 괴로울 때, 예전에는 그 괴로움을 없애려고 했다.
'이러면 안 돼.'
'큰일이야.'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현실에 저항할수록 괴로움은 점점 커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나는 지금 아이 때문에 걱정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 감정을 그대로 느껴본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잠시 내 안에 투사된 하나의 경험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것을 밀어내지 않고 충분히 느끼고 받아들이는 순간, 어느새 사라진다.
나는 이것이 현존의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괴로움을 없애려고 할수록 괴로움은 커지고, 괴로움을 온전히 느끼려고 할수록 괴로움은 오히려 작아진다.
감정 자체보다 감정에 대한 저항이 나를 더 괴롭게 했던 것이다.
삶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힘들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내가 삶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삶을 선택하는 기준을 조금 바꾸려고 한다.
예전에는 '무엇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까?'를 물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피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질문을 하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자전거를 타며 행복하면 그 행복을 온몸으로 느끼고, 아이 때문에 걱정되면 그 걱정도 온전히 느껴본다. 돈 때문에 불안하면 그 불안 속에 잠시 머물러 보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랑의 감정을 충분히 경험한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에서 어떤 감정은 허용하고 어떤 감정은 제거하려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삶은 행복한 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이 있기 때문에 기쁨을 알고, 상실이 있기 때문에 소중함을 알고, 불안이 있기 때문에 안도감을 알고, 결핍이 있기 때문에 충만함을 안다. 어쩌면 삶은 완벽하게 행복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내가 연극의 관객이라고 생각했다. 내 감정을 바라보는 관찰자.
그리고 한때는 내가 연극의 연출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현실을 만들고, 내가 원하는 삶을 끌어당기고, 내가 원하는 감정만 선택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나는 이 삶의 배우이고 싶다.
배우는 슬픈 장면에서 웃지 않는다. 슬픈 장면에서는 슬퍼한다. 사랑하는 장면에서는 사랑한다. 분노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분노한다. 기쁜 장면에서는 마음껏 기뻐한다. 그렇다고 배우가 자신이 배우라는 사실을 영원히 잊는 것도 아니다. 연극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경험한 모든 장면을 돌아본다.
나는 이제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삶에 완전히 빠져들되 삶에 끌려다니지는 않는 것.
감정을 온전히 느끼되 감정에 나를 맡기지는 않는 것.
괴로움을 피하지 않되 괴로움 속에서 길을 잃지도 않는 것.
행복을 추구하되 행복하지 않은 순간을 실패로 여기지 않는 것.
이것이 내가 지금 생각하는 현존이다. 현존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현존은 감정을 초월하는 것도 아니다. 현존은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이 세계가 진짜인지, 시뮬레이션인지, 홀로그램인지, 누군가가 만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비밀을 알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는 것.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내가 가진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걱정하고, 다시 웃는 것. 삶의 비밀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미스터리 속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
나는 이제 삶을 더 이상 '고쳐야 할 문제'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도, 사업이 잘되지 않는 것도, 가족과 갈등하는 것도,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내가 행복한 것도, 자전거를 타며 자유를 느끼는 것도, 모두 지금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이다. 그러니 앞으로는 좋은 것만 골라서 살려고 하지 않으려 한다.
괴로움이 찾아오면, '이것도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경험이구나.'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슬픔이 찾아오면, 그 슬픔을 충분히 느껴주려 한다. 그리고 행복이 찾아오면, 그 행복 또한 놓치지 않고 온몸으로 느끼려 한다.
언젠가 이 삶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내가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도 결국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나는 이 삶을 얼마나 온전히 경험했는가?
그것이 어쩌면 내가 이곳에 와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제 나는 삶을 바꾸는 것보다, 삶을 경험하는 쪽을 선택하려 한다.
고통을 없애는 것보다 고통을 느껴보고, 슬픔을 밀어내는 것보다 슬픔을 받아들이고, 행복을 붙잡는 것보다 행복을 충분히 누리려고 한다.
관찰자가 되어 삶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연출자가 되어 삶을 내 뜻대로 바꾸려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그저 지금 이 무대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주어진 장면을 온전히 살아내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에는 너무 흠뻑 빠져 고통이라는 감정을 괴로워했고 삶을 원망했다. 그래서 관찰자 모드로 도망쳤고, 충만 모드로 행복만 추구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느끼는 충만, 행복, 슬픔, 괴로움 모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