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프롬프트. [AI 무성 영화 시대]

by민경민
ChatGPT Image 2025년 5월 27일 오전 04_12_26.png
Veo 2를 중심으로 제작했던 첫 단편 <Go Around>


네 번째 프롬프트. [AI 무성 영화 시대]


평소에 항공사고 관련 유튜브와 다큐를 즐겨 보았는데, 아무래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재해라 더 눈길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작품을 구상하기 전 그런 영상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항공기가 자연재해나 특별한 사정으로 활주로에 제대로 착륙할 수 없을 경우 기장이 외치는 “Go Around!” 복행 선언이 문득 떠올랐다.


우리나라 제주공항처럼 측풍이 심한 곳에서는 제때 활주로에 착륙하지 못하고 다시 급상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 항공 사고 사례에서 복행 선언을 제때 하지 못해 되돌릴 수 없는 끔찍한 사고를 맞이한 경우는 아주 많다. 우리가 잘 아는 비극이 KAL기 괌 추락사고다.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 활주로를 발견하지 못한 기장이 뒤늦게 복행 선언을 했지만 바퀴가 언덕에 걸리면서 항공기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만다. 이때 복행 선언이 몇 초만 빨랐더라면 항공기는 무사히 상승하고 전원 생존할 수 있었을 거라고 한다. 그런 사고를 접하다 보면 이미 사고가 났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기장님 지금 기수를 올려야 해요!’ 같이 혼자 마음속으로 소리치기도 한다.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영화에 담아서, 영화 속에서만큼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심경을 담아보기로 했다.


항공 재난을 소재로 프로토타입을 만들기로 한 까닭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장 Veo 2를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영상은 기껏해야 2분 남짓한 단편이다. 대부분의 항공 사고는 채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잘못된 의사 결정이 오가거나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재난으로 바뀐다. 더구나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2016)과 같은 영화처럼 항공 사고에서 생존한다는 건 거의 기적처럼 여겨진다. 그러니 짧은 시간에 극적인 서사를 만들기에 이만한 소재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넷플릭스 드라마 <In to the night>(2020)를 재미있게 봤는데, 드라마의 대략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태양의 이상 현상으로 지구의 낮인 지역은 절멸하고 밤인 지역은 살아남게 되어 마침 밤하늘을 날고 있던 비행기 크루와 승객들이 살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계속 이동한다는 내용이다. 한번쯤 상상하던 내용인데 갈등 상황을 꽤 그럴싸하게 묘사해서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그러니까 비행기가 착륙하면 안 될 상황이 벌어지고, 기장이 복행을 선언하는데 갈 곳은 마땅찮은 그런 이야기를 나도 한번 만들고 싶었다.


여전히 나는 AI 영상 제작이 영화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시작은 가볍게 했다. 우선 인물은 두 명, 실내 공간은 조종석으로 한정하되 아포칼립스 재난 영화에 걸맞게 핵심 장면은 항공기의 비행 장면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했다. Veo 2가 그런대로 구색은 갖춘 영상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복잡한 공간을 다루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제 막 초심자로 뛰어든 내가 여러 인물을 동시에 다루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항공기의 비행 같은 묘사는 최소한 오래된 3D 게임의 묘사는 뛰어넘었기에 원하는 만큼 영상을 만들 수는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는 건 이 즈음의 AI 영상들은 네이티브 오디오를 갖지 않아서 모든 앰비언스(배경 및 환경음)는 물론 인물의 대사까지도 별도의 후시 녹음 같은 사운드 작업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무성영화 시기 영화제작자들도 분명 같은 고민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의 시간여행을 한 것만 같았다.


1910년대 초반에서 토키(유성영화)가 등장하는 1920년대 후반까지 영화는 소리 대신 영화의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썼다. 장면 사이에 이른바 ‘간자막’이라고 하는 대사를 써넣은 필름을 끼워 넣거나, 배경음엔 부분적으로 악단을 동원했다. 미국의 순회 극장 니켈로디언 시기엔 축음기를 놓거나 배우들이 영상을 보면서 스크린 뒤에서 직접 성우처럼 연기를 했다(우리나라 무성 영화 시기 변사라고 불리는 영화 해설가의 시초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니 재밌는 현상도 일어났는데,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극장에서는 큰 오케스트라가 배경음을 연주하고 작은 극장에서는 피아니스트 한 명이 피아노로 반주를 맞추는 등 음악의 빈부격차도 생겨났다.


내가 이 작업에서 사용한 건 간자막과 배우들의 즉석 연기, 축음기, 오케스트라 방식을 모두 통합한다. 영상 생성 모델이 직접 음향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초기 Kling AI는 TTS로 만든 음성을 립싱크로 맞춰주는 기능을 선보였으므로 별도의 TTS로 영어 대사를 만든 다음 화면에 립싱크를 입히는 방식으로 대사를 읽게 할 수는 있었다. 그래도 자연스럽지는 않기 때문에 자막을 달아 시선을 분산하면서 의미를 전달하고, 인물의 입이 잘 드러나지 않는 구도를 선택하거나 영화 편집에서 L컷, J컷이라 하는 기법을 활용해서 인서트 숏을 대사 위에 입히는 식으로 부족한 대사 연기를 메웠다. 물론 그런 온갖 노력에도 대사 하는 인물을 구현하는 건 너무나 어색했다.


인물의 대사뿐만 아니라 앰비언스를 채우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다. 이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작업에서도 크게 느끼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소리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다양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소리’라는 건 적어도 10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소리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비로소 나온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조용한 방 안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 작품은 비행기에 관한 것이었으니 최소한 다섯 개는 깔고 들어간다. 비행기 엔진 소음, 콕핏 내부의 전자기기들이 내는 소음, 인물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인물 대사, 그밖에 바람 소리와 같은 자연환경음. 그나마 이 작품에서는 항공기 소리를 키워서 다른 소음을 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있었다. 다만 컷에 맞는 항공기 소음을 적절히 배치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간혹, 어떤 영화들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소리나 실제 존재하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소리를 창작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이리언>(1979)에서는 동물 모사의 달인 퍼시 에드워즈를 초빙해 에이리언의 목소리를 내게 한 다음 후처리로 음성을 기괴하게 깎아 만들었다. 거기에 전설적인 사운드 디자이너 벤 버트는 이 작품에서 에이리언의 산성 침이 금속을 부식시키는 소리를 만들 때 액체질소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상 소음에서 침대에 걸터앉는 장면이 있다면 풀리 아티스트가 천조각으로 싼 무거운 물체를 방석에 던지는 식으로 효과음을 만들 수도 있는데, 이는 실제 들리는 소리를 다른 방식으로 창조한 것이다. 이건 마치 액션 영화에서 펑펑 터지는 주먹 소리가 실제가 아님에도 쓰이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안타깝게도 허름한 니켈로디언 소극장보다도 작은 규모로 작업을 진행하던 내게는 그런 전문가들이 없고, 또한 내가 잘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시행착오를 직접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밖의 문제도 발견했다. 항공기 소음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막상 제트엔진 항공기의 소음을 배경에 깔고 보니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소음이 심하지 않았고 소리가 역동적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바카라으로 터보프롭 항공기의 엔진 소음을 제트엔진 여객기 영상에 깔았는데, 묘하게 잘 맞았다. 그때 나는 꼭 소리와 영상이 일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적절하기만 하면 다른 소리를 매칭해도 괜찮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작업에는 일상에서 흔히 듣기 힘든 소리도 있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운석이 비행하는 소리, 운석이 떨어져 지상과 공항이 파괴되는 소리도 난관이었다. 이 부분에서 처음엔 폭탄이 터지는 폭발음 같은 사운드를 넣었으나 공간감이 너무 작다고 생각해서 다른 소리를 찾아야 했다. 이런 저런 배경음을 들어보다가 아예 화산 폭발하는 소리를 넣었더니 그제서야 그럭저럭 영상과 톤이 맞았다. 그런 식으로 나는 배경음 문제를 어느 정도 타개해 나갔다. 그렇다고 그게 다 만족스럽다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AI 영상 도구가 배경음까지 영상에 맞춰주지만 ‘AI 무성 영화 시절’을 겪으면서 영화 음향의 중요성, 그걸 능수능란하게 해결하는 위대한 사운드 디자이너들의 노력을 새삼 더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음향은 궁여지바카라으로 어떻게든 갈무리 지을 수 있어도 이미지인 AI 영상 자체만큼은 정말이지, 끔찍하게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세 번째 프롬프트. [이게 영화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