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승은 승리의 구호가 아니었다

by별빛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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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내가 복무했던 해병대 사관후보생 동기들은 100여 명 남짓이었다. 대부분은 3년의 의무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선택했다. 누군가는 취업을 했고, 누군가는 자영업을 시작했다. 일부는 군에 남아 소령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중령 계급장을 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른다. 몇 번 연락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은 보험 영업과 관련된 연락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락은 끊겼다.

가끔 생각나는 동기들도 있다. OP장으로 근무했던 한 동기는 외박 때마다 나와 순대국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슬롯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 뒤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한 동기는 나와 같은 회사에 입사했고, 나보다 먼저 회사를 떠났다. 또 다른 동기는 나보다 더 높은 직급으로 진급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많은 동기들과 연락이 끊긴 것은 어쩌면 공감대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과 그들이 선택한 길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복잡한 생각들을 글로 꺼내고 싶었다. 돈을 버는 사람보다 내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글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생각도 정리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복잡해졌지만, 글은 늘 첫 줄에서 멈췄다. 그러니 내가 동기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쩌면 핑계에 가까웠다.

내 군 생활도 그랬다.

3년이 조금 넘는 시간은 내게 무언가 악몽 같기도 했고, 허공 속을 둥둥 떠다니는 시간 같기도 했다. 미래를 거창하게 구상한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뚜렷한 방향을 잡아본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세상 바깥에 떠 있는 사람처럼 군 생활을 시작했다.


200*년 3월, 나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해병대 장교에 지원했다. 대학원에서는 밀려났고, 취업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대학 동기들이 토익과 자격증 준비로 밤을 새우던 시절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언론고시를 준비했다. 후진타오의 이름을 한자로 쓰는 것이 기자의 소양에 왜 필요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그런 준비를 하며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않은 채 군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장교로 지원한 동기,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이 있다는 동기,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 생활을 하다 군대로 온 동기까지. 모두가 각자의 삶과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는 그런 개별성을 원하지 않는 곳이었다.


밥 먹는 시간도 같아야 했고, 일어나는 시간도 같아야 했다. 화장실을 가는 순간마저도 통제되었다. 옷도 같아야 했고, 명찰의 위치도 같아야 했다. 좌측 주머니 위에 몇 밀리미터를 띄워야 하는지, 실밥은 어느 간격으로 맞춰야 하는지까지 정해져 있었다.

우리는 첫날부터 노란색 장판에 미싱으로 이름을 새긴 후보생 명찰을 군복과 CS복에 꿰매야 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육각형 사관후보생 계급장도 양쪽 옷깃에 바느질로 달았다.


그때 구대장들은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들의 계급은 일반 사병과 부사관 그 사이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사관후보생은 군인도 아니었고, 민간인도 아니었다. 아직 군번이 나오지 않았으니 완전한 군인도 아니었지만, 장교교육대 안에 있었으니 군인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 경계에 있는 우리에게는 불침번과 야간 경계근무가 주어졌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포항의 교육훈련단은 이미 기간병들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실탄이 지급되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탄창 없는 빈총을 어깨에 메고 철모와 탄띠를 두른 채 어둠 속에 서 있어야 했다.

교대는 2시간 단위였지만, 해병대의 시간은 조금 달랐다. 후임 근무자는 15분 먼저 투입되어야 했다. 결국 15분 동안은 전임조와 후임조가 함께 서 있어야 했다. 그것이 어떤 효율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시간은 경계근무라기보다 군인이 되어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민간인으로 가지고 있던 의문과 불만을 조금씩 지워내는 시간. 비판하는 마음보다 명령에 먼저 반응하도록 만드는 시간.

훈련은 몸을 바꾸기보다 감각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들은 목소리가 갈라지고 찢어지면 군인다운 목소리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동기는 그저 찢어진 목소리로 훈련을 수료했을 뿐이었다.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팔꿈치와 무릎의 살이 갈리고 나면 군인다운 몸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내 팔꿈치의 상처에는 균이 들어갔고, 그 자리는 평생 귀찮게 따라다니는 질환으로 남았다.

군대는 그런 곳이었다.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곳. 모두가 피곤하게 쓰러져 있는 밤에 누군가를 깨워 자신의 아픔을 말하기 어려운 곳. 1분 1초의 수면이 더 절실한 곳.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침낭과 모포를 정리하고, 칫솔과 휴지를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5시 45분이 되면 몸은 자연스럽게 깨어났다. 졸음이 남아 있어도 손은 먼저 침낭을 접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는 생각이 아니라 반응으로 시작되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배웠지만, 그곳에서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법을 먼저 익혀야 했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 걸까.’


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던 것인지, 어느 순간 눈앞에 번쩍하는 빛이 지나갔다. 구대장의 하이바가 내 머리를 세게 내리친 뒤였다.


“구부렷!”


해병대에서 “구부려”는 엎드려뻗쳐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면 후보생은 “구부렷, 악!” 하고 복명복창을 해야 했다. 그리고 엎드렸다. 때로는 “구부려”와 “일어서”가 반복되었다. 의미 없는 동작이었지만, 의미 없는 복종마저 훈련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그때도 생각했다.


‘이 짓을 왜 해야 하는 걸까.’


군인에게 복종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종은 의미가 있을 때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 의미 없는 복종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것은 군인정신이 아니라 사람을 비우는 일에 가까웠다.

이후 자대에 배치된 뒤에도 나는 비슷한 것들을 보았다. 의미 없는 복종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해병대의 자부심이라 불렀다. 폭력과 모욕이 장난처럼 오가고, 선임의 권위는 종종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보다 앞섰다.


후보생 시절의 냄새도 오래 남아 있다.


오이비누와 치약, 빨래비누. 한 달에 정해진 수량만 지급되는 생활용품. 수건 두 장으로 손을 닦고, 머리를 감고, 발을 닦아야 했다. 전투복을 빨아 말리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땀 냄새, 곰팡이 냄새, 젖은 천 냄새, 오이비누 냄새가 몸에 배었다. 처음에는 역겨웠던 그 냄새도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언젠가 장교교육대 뒤편에서 얼차려를 받던 날이었다. 포항의 봄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교육대 뒤편의 대형 쓰레기통 뚜껑이 바람에 열렸고, 안에 있던 휴지 조각들이 하늘로 흩날렸다. 그 휴지들은 우리 얼굴을 스치고, 팔에 달라붙고, 다시 바람을 타고 돌았다.

잠시 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것이 화장실 청소 뒤 옮겨진 휴지였다는 것을.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그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몸에서 나는 냄새가 이미 그보다 더 지독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땀과 구정물과 오물과 비누 냄새가 뒤섞인 냄새. 그 냄새는 어느새 우리의 몸뿐 아니라 마음속에도 배어 있었다.


6주의 훈련이 끝나면 후보생들은 빨간 명찰을 받는다.


그러나 명찰의 색이 바뀐다고 처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군인과 민간인의 경계 어딘가에 있었다. 그 경계에 있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돈으로 계산되었다. 품위유지비라는 이름의 돈에서 옷걸이, 손톱깎이, 다림질, 오바로크 비용이 빠져나갔다. 밤에 배고픔을 참지 못해 먹던 빵과 우유, 차가운 물에 불려 먹던 컵라면, 때로는 건빵까지도 그 돈에서 차감되었다.


나는 이상했다.


세탁소에서 옷을 맡기면 공짜로 딸려오던 하얀 철제 옷걸이조차 왜 돈을 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의문을 말하는 것은 불충에 가까웠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그 시절의 비용 처리와 관련된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어디까지가 소문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나는 그때 알았다.

누군가에게 우리는 군인이 되기 전의 청년들이 아니라, 작은 돈을 꾸준히 빼낼 수 있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입대 첫날의 기억도 비슷하다.


포항 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다. 해병대 교육훈련단으로 가 달라고 하자,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먼 길이라는 듯 말했다. 이상하게 택시는 오래 달렸다. 같은 건물을 몇 번 본 것 같았고, 포항제철은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도착했을 때 요금은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배가 고파 근처 순대국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물에서는 알 수 없는 비린내가 났고, 나는 두 숟가락을 뜨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머니도 많이 드시지 못했다. 훗날 임관 후 다시 그곳을 지나며 알게 되었다. 교육훈련단에서 역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날 우리는 그저 잘 모르는 손님이었고, 이제 곧 군인이 될 청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이상한 기억만 남는다.


12주차 무렵, 우리에게 짧은 외출 시간이 주어졌다. 고작 6시간이었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포항 죽도시장으로 향했다.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순대, 떡볶이, 순대국, 소주, 맥주, 담배. 편의점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웃음이 나왔다. 고작 몇 잔의 술과 담배 몇 대가 그렇게 큰 자유처럼 느껴졌다.

그날 한 동기가 고래고기를 먹어보자고 했다. 죽도시장까지 왔으니 한 번쯤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우리는 수중의 돈을 모았다. 8만 원쯤 되었다. 노점상 주인은 원래는 더 비싸지만 군인들이니 그만큼에 맞춰주겠다고 했다.

작은 접시에 몇 점의 고래고기가 나왔다. 누군가는 애써 맛있게 먹는 척했지만, 나는 그 비린내를 견딜 수 없었다. 한 점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다. 8만 원이면 순대국에 소주를 몇 번이나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우리는 자유의 6시간 중 일부를 그렇게 날려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싫지만 싫지만은 않다. 고래고기의 맛보다 그때의 허탈함이 남아 있다. 바깥세상으로 잠깐 나와 무엇이든 해보고 싶었던 젊은 마음이 남아 있다.


자대에 배치된 뒤에도 군대의 이상한 계산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훈련으로 지친 오후, 구대장은 우리를 강의실로 불렀다. 그날만큼은 편하게 앉아 있으라고 했다. 빵과 우유가 나왔다. 이상했다. 군대에서 공짜로 주어지는 친절은 늘 뒤에 무언가를 데리고 왔다.


잠시 후 전역한 선배 장교가 들어왔다. 그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장교가 되면 돈을 많이 받게 되지만, 그 돈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보험 이야기를 시작했다. 슬롯와 단절된 후보생들에게, 곧 월급을 받게 될 단기 장교들에게, 그는 미래와 안정이라는 말을 팔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보험에 가입했다. 본인 확인 전화를 해야 한다며 휴대폰이 주어졌고, 잠깐 어머니와 통화할 수 있었다. 그 짧은 통화가 어쩌면 계약보다 더 컸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자대에 가서도 회식은 이어졌다.


대대장 주관, 중대장 주관, 병과 참모 주관 회식. 회식은 단합의 자리라고 했지만, 비용은 대부분 하급자들의 몫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전자포탈 메일이 와 있었다.


“어제 즐거운 회식을 마련해 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회식 비용은 아래 계좌로 입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관자는 빠지고, 나머지가 나누어 내는 방식이었다. 식당은 대개 전역한 선배가 운영하는 부대 근처 식당이었다. 2차는 노래방으로 이어졌고, 그 비용 역시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단기 장교에게 돈을 모을 이유는 없다는 말도 들었다. 장교라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나중에 취업도 잘될 테니, 지금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직은 계속 돌아왔고, 당직 다음 날에도 회의는 이어졌다. 마음 편히 잠을 자는 일은 사치에 가까웠다.

내 짧은 군 생활은 그렇게 당직과 회식과 이상한 비용의 기억 속에서 끝났다.

전역 후 나는 취업을 했다. 군대의 시간은 서서히 멀어졌다. 동기들의 얼굴도, 포항의 냄새도, 죽도시장의 바람도 기억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어느 날 문자 한 통을 보았다.


해병 대위 ○○○ 본인상.


동기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어렵게 장기 복무에 선발되었고, 군에 남아 자신의 길을 걷고 있던 동기였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얼마 뒤 그가 유공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는 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정말 아무렇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군대에서 배운 방식대로 감정을 접어두는 데 익숙해진 것일까.

나는 여전히 “필승”이라는 단어를 기억한다.


그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자부심이고, 누군가에게는 청춘의 증거이며, 누군가에게는 견뎌낸 시간의 암호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필승은 더 이상 승리를 위한 구호만은 아니다.


그 말에는 냄새가 배어 있다. 오이비누 냄새, 젖은 전투복 냄새, 새벽 근무의 찬 공기, 말하지 못한 통증, 이해할 수 없던 복종, 그리고 끝내 연락하지 못한 동기의 이름이 함께 묻어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쉽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필승은 승리의 구호가 아니었다.


내게 그것은, 어떤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남긴 가장 짧고도 무거운 침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