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조로운 일상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어느 날, 늘 조용하기만 하던 메신저가 울렸다.
“팀장님. 내일 1시 본부장님께서 잠시 티타임을 갖자고 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어제는 A부장이 그 메신저를 받았고, 그제는 B부장이 받았다. 아니, 정확히 누가 먼저 그 메신저를 받았는지조차 어느 순간부터 희미해져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메신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회사를 떠났다.
며칠 전 점심시간이었다. 나보다 3년 먼저 입사한 김선배가 짜장면을 앞에 두고 말했다.
“정팀장. 방금 본부장하고 차 한잔 마시고 그만두기로 했어.”
김선배는 회사에서 물류 전문가로 이름이 나 있던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회사 안에서 유일하게 물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설마 그 선배가 권고사직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김선배는 나와 짜장면을 나눠 먹고, 가슴이 콱 막히듯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떠나는 김선배와 마지막 담배 한 대를 나눠 피웠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힘닿는 데까지 다음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김선배가 말했다.
“정팀장도 혹시 연락 받을 수 있으니까, 미리 준비해둬.”
그 말이 씨가 되었던 걸까. 며칠 지나지 않아 나도 같은 메신저를 받았다.
본부장의 비서는 자신도 무슨 일인지 모른다는 듯 말했다. 근황을 묻고 차 한잔하자는 자리라고 했다. 간헐적으로 조직 구성원들과 갖는 자리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그 간헐적인 자리에 내가 선택되었다.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비서에게 시답잖은 농담 몇 마디를 남겼을 뿐이다.
사실 본부장의 비서는 아무 바카라임이 없다. 그는 본부장이 시킨 말을 누구보다 먼저 전달받고,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본부장에게 그는 한 손에 잡히는 메신저나 카지노톡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화가 난다고 해서 메신저에게 화를 낼 수도, 카지노톡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2
설마 나에게 그 메신저가 올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김선배가 통보를 받은 그날부터 나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곧장 내 위에 있던 최상무를 찾아갔다. 있는 돈 없는 돈을 써가며 비싼 발베니 한 잔을 따랐다. 그리고 말했다. 앞으로 당신에게 한평생 충성하겠다고.
한 잔에 속이 타들어 갔고, 한 잔에 눈물이 녹아 흘렀다.
하지만 나는 김선배를 살려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나를 살려달라고 했다.
“설마 정팀장에게 그런 일이 있겠어요? 제가 위에 잘 이야기해 둘게요.”
최상무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두 번째 발베니의 뚜껑을 열고 그의 잔을 채웠다.
앞에 놓인 사과, 딸기, 수박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나에게 닥쳐올 위험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저녁 한 끼 하자는 자리였다. 그러나 김선배가 떠난 빈자리는 내 안에 너무 큰 허무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어떤 음식도 내 속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도 소주 한 잔에 탕수육 한 조각, 마파두부 한 조각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불안은 술에 잠기는 듯하다가도 금세 다시 떠올랐다.
우리는 결국 비싼 양주를 파는 바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 소주 한 병도 버거워하는 내가 그날은 술을 계속 삼켰다. 몸은 이미 한계를 넘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술을 마시는 것인지, 두려움을 삼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새벽 늦게 집에 들어갔다. 속은 부글거렸고, 머리는 무거웠다. 그래도 다음 날 아침 나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어쩌면 오늘 하루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갈지 모른다는 희망을 붙잡은 채였다.
3
본부장의 메신저를 받은 직후, 나는 최상무에게 카지노톡을 보냈다.
“상무님. 내일 본부장과 티 미팅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이 연락은 그 메시지인 듯합니다.”
한 시간쯤 지나 최상무가 답장을 보냈다.
“설마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짧은 문장이었다. 무미건조했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김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선배는 자신도 똑같은 상황이었다고 했다. 평소 일면식도 없던 본부장 비서가 메신저로 본부장과 티타임을 하자고 연락했다는 것이다.
시간은 대략 30분 정도 잡혀 있었다고 했다. 본부장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5분 정도 나눈 뒤, 회사는 그에게 그만두라는 제안을 했다. 여러 리더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김선배와 함께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다.
김선배는 이 회사의 유일한 물류 전문가였다.
그런 사람에게도 회사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건넸다.
그 시간이 고작 10분 남짓이었다고 했다.
김선배는 더 이상 회사에 있을 이유가 없어 짐을 싸고 나왔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나에게 카지노톡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다.
나는 내가 회사에 어떤 해를 끼쳤는지 떠올려 보았다. 성과가 부족했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최상무와 신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결실을 만들기 위해 뛰었고, 이제 막바지까지 올라온 시점이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매출이 발생할 터였다. 회사의 리더십도 내가 그 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 성과의 대부분은 최상무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나는 그중 아주 작은 몫, 좋은 고과와 발탁 진급이라는 열매만 받으면 된다고 믿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며 걸어가기로 약속한 터였다.
“분명 정팀장님이 회사에 기여하는 게 많으니 그런 결정은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정팀장이 권고사직 대상이라면 제가 대표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상무의 말은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하루 동안 발악하지 않고 조용히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를 달랜 것일까.
그 의도를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길 바랐다. 본부장과 가볍게 차 한잔을 마시고,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격려를 듣고 싶었다. 이왕이면 신사업이 궤도에 오를 수 있도록 금일봉이라도 쥐여주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몇 푼 안 되는 금일봉이라도 좋았다. 그 돈으로 소주 한잔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에 가는 길에 어린 딸들에게 예쁜 인형 하나씩 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바쁜 본부장이 한가하게 나의 성과를 치하하기 위해 차 한잔을 하자고 했을 리 없었다. 분명 나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비서를 통해 연락했을 텐데,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래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최상무가 지시한 일을 마무리해야 했지만,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떠나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일까.
이번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까. 아니면 어릴 때 일기장처럼 참 재미있었다,로 마무리될까.
“아직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니, 내일 한 번 들어보고 결정하시죠.”
최상무는 한 발 물러나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며, 설마 그런 일이 생기면 대표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치 이미 어느 정도 윤곽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상무님.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생각이 잡히지 않습니다.”
불과 20분 전까지만 해도 저녁 먹고 일을 마무리하자던 최상무는 한동안 허공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나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대형 사업을 추진했고, 그 사이 작은 사업들도 만들어 냈다. 내가 직접 만들 수 있는 매출은 결코 작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매출 몇십억만 달성해도 임원 후보군이라 했으니, 나는 이미 충분한 실적을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퇴임한 선배들도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모든 약속이 본부장과의 티타임 앞에서 갑자기 흐려지고 있었다.
4
나는 원래 진급해야 할 시기보다 2년 일찍 팀장이 되었다.
발탁 진급이었다.
나를 시기하는 리더들이 있었는지 진급 후 고과는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 그래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급이라는 카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큰 성과라 여겼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기에 감격의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불과 1년 전 일이었다.
나의 발탁 진급 소식은 이미 퇴임한 선배들에게도 전해졌다. 선배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챙겨 온 내가 기특하고 자랑스럽다며 자신들이 가진 어카운트를 모두 전수해 주겠다고 했다. 회사 창립 이래 단 한 번도 뚫지 못했던 A어카운트도 나를 통해 열릴 수 있다고 했다.
실제로 A어카운트 대표와 골프 라운딩 자리까지 잡혔다. 그 자리에서 우리 회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나는 대형 빅딜뿐 아니라 작은 사업들도 발굴했다. 실적이 필요했던 후배나 선배들에게 내가 만든 기회를 흔쾌히 넘기기도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말했다.
“역시 정팀장밖에 없어.”
그 말 한마디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런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반전되어 돌아왔다. 본부장과의 티타임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바짓가랑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상무를 찾아갔다. 김선배는 그러지 못했지만 나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살아야 했으니까.
1년 남짓 전에 산 아파트의 대출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내가 진급한 기념으로 바꿔준 아내의 차도 아직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었다. 지금 당장 회사를 떠나게 된다면 어렵게 마련한 서울 도심의 아파트도, 검은색 차도, 그동안 내가 쌓아 올렸다고 믿었던 삶의 모양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든 최상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정해야 했다.
그간 쌓아 둔 성의 벽돌들이 모래성처럼 흩어지려는 순간이었다.
5
“상무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상무는 담배 한 대를 태우자고 했다.
우리는 밤하늘 아래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연기를 내뿜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말 대신 연기만 허공에 흩어졌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했던 순간들 속에서 모든 결과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상무는 처음에는 나를 아기 달래듯 달래며 하루를 넘기고 싶어 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한 뒤에는 달래는 일조차 소용없다고 느낀 듯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아마 화가 날 테지만, 잠시 정신을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 순간에 어떻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인가.
본부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라는 뜻일까. 아니면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라는 뜻일까. 그 이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으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몰랐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열변을 토하는 것이 이성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상무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상무는 답을 주지 못했다.
그저 말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죠.”
이미 시간은 저녁 9시가 넘었다.
나는 가방을 정리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좌석은 비어 있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어떤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소리는 그저 소음처럼 귓속을 맴돌았다.
내 눈앞에는 행복하게 퇴근하는 사람들과, 내일부터 막막한 곳으로 밀려날지도 모르는 나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따뜻한 온실 안에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짐도 꾸리지 못한 채 드넓은 광야로 나가야 하는 순례자가 된 기분이었다. 옷깃에 꽂혀 있던 뱃지도 나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사원증도 곧 반납해야 할지 모른다.
힘든 발걸음 끝에 집 근처에 도착했다.
하지만 쉽게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점심도 컵라면으로 대충 때운 탓에 속은 허기로 뒤틀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나는 휴대폰 수신함을 열어 함께 소주 한잔할 사람을 찾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유팀장의 번호가 눈에 띄었다.
유팀장은 최상무와 함께 사업을 발굴하고 성과를 공유하던 사람이었다. 집에서도 택시로 15분 거리였다. 지금 상황을 이야기하면 흔쾌히 소주 한잔하자고 할 것 같았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혹시 타이밍을 놓친 걸까.
두 번째, 세 번째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같은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계속 휴대폰을 눌렀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쯤 눌렀을까.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어쩌면 유팀장은 내 번호가 울리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상황을 이미 알고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 번호가 뜨는 것이 귀찮아 전원을 꺼버렸는지도 모른다. 물론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옆에 있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들이 나를 짓눌렀다.
1년 전, 대형 사업에 실패한 최상무는 좌천되듯 한직으로 물러났었다. 나도 프로젝트가 종료된 뒤 어카운트의 클레임을 해결하기 위해 볼모처럼 남아 있었다. 그때 최상무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타이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퇴임한 선배들이 도와주기로 한 어카운트가 있고, 유팀장이 가진 어카운트가 있으니 그것들을 합치면 회사 안에서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날 밤 10시 30분, 나는 유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 바로 오라고 했다. 나와 최상무, 유팀장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우리는 앞으로 평생의 동료이자 동반자로 함께 가자고 맹세했다.
그날의 소주 한잔은 발베니 한잔으로 바뀌었다. 최상무는 기분이 좋다며 비싼 술을 계산했고, 유팀장도 1차 술값을 흔쾌히 냈다. 나는 그 좋은 자리를 마련한 공로자였고, 그 공을 평생 잊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최상무는 소주 한잔하자고 하지 않았다.
유팀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날의 도원결의는 사라지고, 오늘 밤의 술자리는 나 혼자만의 것이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술자리는 계속 혼자여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 곳이 없었다.
내 발걸음은 늦은 밤까지 문을 닫지 않는 순대국밥집으로 향했다.
순대국 한 그릇과 편육 한 접시. 정확히는 순대국 정식이었다. 얇은 편육 몇 점과 소주 한잔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김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저도 비서한테 메신저를 받았습니다.”
차가운 소주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뜨거워지더니 다시 싱거워졌다. 편육은 돌덩이를 씹는 맛이었고, 순대국의 붉은 국물은 간장을 삼키는 듯했다.
나는 소주만 잔에 채우고 계속 삼켰다.
“하… 정팀장마저도? 도대체 회사가 뭘 어떻게 하려는 거지?”
김선배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뒤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또 다른 병을 추가했다. 잔은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다. 소주는 내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고, 그 열기는 다시 눈물로 올라왔다.
6
소주를 몇 병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잔뜩 취한 채 집에 들어와 쓰러지듯 잠들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을 감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내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제 일을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 일이 내 잘못인지, 아니면 그저 회사의 결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나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감기는 꼭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걸리는 것이 아니다. 밤에 이불을 걷어찼기 때문에, 옷을 얇게 입었기 때문에, 목이 차가웠기 때문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감기는 내 의지만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본부장과의 티타임도 마찬가지였다.
내 의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티타임은 오후 1시에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참 잔인한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체하라는 뜻인지, 그 시간이 유난히 야속했다.
차라리 아침 일찍 이야기를 들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끝나고 사우나 욕조에 들어가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담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침부터 소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잊어버릴 시간이라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본부장은 수많은 시간 중에서 1시를 골랐다.
어쩌면 나는 그의 속을 막고 있던 소화되지 않는 음식물 덩어리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나와 티타임을 끝내고 나면 그 체증이 내려갈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와 본부장의 관계는 서로에게 체증이자 소화제였을 것이다.
시간은 점점 다가왔다.
9시.
10시.
11시.
12시.
12시가 되자 시간은 이상할 정도로 느려졌다. 초침은 시침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듯했다. 입은 타들어 갔다.
본부장의 집무실에서 이야기할까. 아니면 별도 회의실일까.
장소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비서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티타임 장소가 어디인가요?”
비서는 아직 장소를 듣지 못했다며, 시간이 임박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다. 그 사실 때문에 잠깐의 희망이 생겼다. 혹시 내가 확보한 어카운트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떠나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일까.
평소 시끄럽게 울리던 카지노톡과 메신저는 그날따라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시간만 흘러갔다.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일을 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미 어느 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유팀장도, 최상무도 오늘은 외근이라고 했다. 늘 삼총사처럼 함께 뭉쳐 다녔지만, 그들은 내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다른 가능성도 떠올려 보았다.
혹시 금일봉을 주기 위한 자리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오늘 저녁 우리 셋이 모여 발베니 한 병을 주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술잔을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좋은 소식이라면 굳이 이렇게 따로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 축하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언제 시간 되느냐며 저녁이나 차 한잔하자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본부장과의 티타임은 격려의 자리가 아니라 권고의 자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 거친 밖으로 나가야 할 판이었다.
7
한 달 전쯤 분기평가가 있었다.
내 점수는 0점이었다.
대형 어카운트를 발굴하고, 소규모 어카운트도 함께 진행하고 있었지만 정작 내 성과로 인정받은 것은 없었다. 10억 남짓한 소규모 어카운트에 대해서도 최상무는 말했다.
“우리가 다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옆에 차팀장에게 넘기는 건 어떨까요?”
200억 남짓한 대형 어카운트에 대해서도 그는 말했다.
“이번만큼은 정팀장에게 좀 더 큰 기회를 주고 싶어요. 이 어카운트에 참여자로 이름을 올리기보다는, 소규모라도 제안자로 올라 차기 임원 후보군으로 나아가는 건 어떨까요?”
그 순간만큼은 꿈만 같았다.
이 회사에 입사하며 언젠가는 임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임원이 된다는 것은 늘 멀고 흐릿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자리를 향한 제안을 최상무가 먼저 꺼냈다.
그는 앞으로 나의 고과는 자신이 이 회사에 다니는 한 평생 챙겨주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임원이 되려면 스토리가 필요해요. 그 스토리를 우리 한번 같이 만들어 봅시다. 올해는 힘들겠지만, 내년에는 분명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스토리가 필요한지, 어떤 성과가 필요한지, 누구와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지까지 자신이 다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그 순간 내 눈앞에는 찬란한 미래가 펼쳐지는 듯했다.
지금처럼 지하철을 타며 땀범벅으로 출퇴근하는 날도 언젠가는 끝날 것 같았다. 법인 차량, 임원실, 주차장, 대리운전 같은 것들이 나와 아주 무관한 단어만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최상무의 지지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늘 나와 함께하겠다는 유팀장도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유팀장도 이번만큼은 자신이 양보하겠다고 했다. 어떤 실적이 있더라도 내 성과가 우선이라고 했다. 내가 임원이 되는 것이 먼저이고, 자신은 그 이후의 목표를 향해 달리면 된다고 했다.
이유는 없다고 했다.
다만 나의 절박함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 절박함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했다.
시간은 12시 53분이었다.
곧 54분이 되었다.
몇 분만 지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길은 이미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 바쁜 본부장이 일개 팀장에게 30분씩 시간을 할애해 티타임을 갖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마 그는 쿨한 척, 아름답게 떠나보내는 모습을 만들고 싶을 것이다. 나는 곧 본부장의 티타임이라는 명목 아래 회사 밖으로 밀려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최상무는 침묵했다.
유팀장도 침묵했다.
카지노톡 메시지 하나 오지 않았다.
8
12시 58분쯤이었을까.
본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잠시 시간이 괜찮다면 1층 로비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1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1초가 아니라 1시간씩 흐르는 듯했다.
스타벅스에 도착했을 때 본부장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저 멀리 빈 테이블 하나가 보였다.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뒤 멀끔한 정장을 입은 본부장이 서류 가방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어느 대형 어카운트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매일 방문하고 있다고 했다. 그 어카운트와의 관계는 아름답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본부장 역시 바짓가랑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담당자를 만나 읍소하고 있는 셈이었다.
최근 몇 달 동안 대형 어카운트 입찰은 모두 실패했다. 안일한 판단 때문이었을까.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회사 안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적을 채우지 못한 채 월급만 축내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나마 내가 몇 군데 사업을 발굴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나의 성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본부장은 자리에 앉아 차를 한잔 시키라고 했다.
나는 시원한 콜드브루를 부탁했다. 본부장도 같은 걸로 하겠다고 했다.
1분도 안 돼 차가운 글라스에 얼음과 검은 커피가 담겨 나왔다. 나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빨대에 입을 가져다 댔다.
본부장이 말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상투적인 질문이었다.
늘 그렇다.
불과 5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여러 리더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나와 함께 일하겠다고 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니 회사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최상무도 없었다.
함께 사업을 만들고, 함께 일하자고 했던 최상무도 나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나와 함께할 수 없고, 나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했다.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알겠다고 말했다.
위로금이나 충분히 챙겨달라고 했다.
본부장은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그냥 이 순간 여기서 끝내자고 말했다.
“그래도 혹시 제가 도와줄 건 없을까요?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시간조차 필요 없다고 했다.
그저 위로금이나 충분히 챙겨주면 된다고 했다. 그 규모는 내가 만족할 수준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짧은 티타임이 끝났다.
나는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회사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아무도 나에게 메신저를 보내지 않았다. 카지노톡도 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회사 안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을까.
아직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는데 집 근처를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익숙한 동네가 낯설게 보였다. 매일 밤늦게 돌아오던 길이었다. 그런데 대낮의 그 길은 전혀 다른 장소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야 하는 방랑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은 넥타이를 매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