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조용한 날들의 기록"
무엇이 당신을 살게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애쓰는가.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살고 싶은 삶은 어떤 삶인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가. 이 하루, 무엇을 위해 견뎌냈는가. 어떤 꿈이 있는가. 그 꿈, 왜 소중한가. 누구와 그 꿈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가.
당신에게 있었던 숱한 일들, 그로 인한 상처. 지금 품고 있는 불안과 흔들림. 주변사람들은 모르지만, 당신만 아는 그 울컥함. 이제는 지쳐서 도저히 더 걸을 수가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아 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당신을 살아내게 하는 것. 당신을 존재하게 하는. (누가 봐도) 충분히 했고, 무너져도 되는 시점에서도 당신을 '생존'할 수밖에 없게 하는, 지금까지 버틸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철학자가 당신에게 묻는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이제 몰락한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 버텨온 안쓰러운 당신은 이제 몰락할 것이다. 당신을 갈아 넣으면서도 지키고자 했던 가족, 보답하고자 했던 부모님, 주변 소중한 사람들, 전부를 바쳐 사랑했던 연인도 곧 몰락한다. 지금까지 쌓아온 당신의 슬롯 경제적 자산도 모두 물거품과 같이 사라진다.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준비했던 미래도 당연히 도래하지 않는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 어떤 생각과 감정을 주는가. 나의 모든 것들은 (그토록 소중했던 것들은) 곧 몰락될 것이고, 구원은 그보다 더 멀리 있다.
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몰락에 슬퍼진다.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들이 사라지고, 물거품이 되는 것에 억울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의지와 노력, 지식과 전략, 기술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갑자기 다가오는 몰락도 내가 막을 수 없었지만, 이 '문제적 상황'에 내가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까지 맞이했던 문제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철학자는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로 끝내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인가?"로 연결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갖게 하면서, 우리를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한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상황'은 '해결해야 할 것'이 있는 상황이며, 여기서 '해결해야 할 것'은 곧 '몰락'이다.
'몰락'은 부정적 의미로 다가온다. 실패하고 무너지며, 멸망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몰락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애쓴다. 대학 입시와 취업, 사업, 투자 등 슬롯 경제적 성취뿐만이 아니다. 또래집단에서부터 연인 또는 부부, 가족, 친구, 지인, 온라인 게임 동료 등, 인간관계에서도 '배제', 즉 몰락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우리는 '몰락'이라는 단어가 다가왔을 때 먼저 경계하고 회피하게 된다. 그리고 '몰락'이 가깝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극복하거나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로 반응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 몰락이 가깝긴 하지만,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몰락보다만 멀다는 것이다. 몰락하고 끝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구원이 몰락보다 멀리 있다는 것이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철학자는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 본래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구원을 위해서는 몰락은 필수적이다. 몰락 없는 구원은 없다.
십자가의 죽음, 즉, '몰락' 없는 부활은 없다. 부활이 없으면 재림도 없고, 재림이 없으면 '구원'의 완성은 없다.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존의 내 자아, 집착, 세계관이 완전히 부서지는 '몰락'을 경험해야 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도덕적인 세계(부모의 세계)의 '몰락'을 겪은 후,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괴테,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학자로서의 삶과 이성적 세계가 완전히 '몰락'하고,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을 통해 끊임없이 방황하고 타락한다. 괴테는 이 '방황과 몰락의 과정'을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필연적 여정으로 묘사한다.
자연에서도 구원은 몰락을 기반으로 한다. 새에게 '알'은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안전한 '우주'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곧 안전했던 우주는 자신을 가두고 숨 막히게 하는 '감옥'으로 변한다. 이때 새끼는 자신의 온 우주를 사정없이 쪼아 부수어야 한다. 자신의 최초의 세계가 처참하게 조각나며 몰락할 때, 새는 알 밖의 진짜 구원을 마주하게 된다.
뱀의 허물도, 곤충의 번데기도, 씨앗도,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계절도, 모두 몰락 뒤에 구원이 찾아온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구원을 위해서는 몰락이 필수적이다. 몰락 없는 구원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몰락이 두려워, 몰락하지 않기 위해 평생을 애쓴다. 우리는 구원을 피하기 위해 평생을 애쓴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끝내 경험하지 못한다. 완벽하게 보호해 주는 안전한 '우주'속에 갇혀 숨이 막혀 허덕이며 생을 마감한다.
철학자는 곧 다시 질문한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찌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닌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는 '몰락'을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행동적 접근이 아니다. 곧 다가올 '몰락', 그 뒤에 다가올 '구원'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를 고뇌하는 존재적 접근이다.
새로운 질문,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몰락'과 '구원'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우선 우리는 '몰락'이 두렵다. 완전한 슬롯 경제적 실패,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완벽한 배제. 건강도 잃었다. 머물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다. 힘든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눌 그 누구도 없다. 혼자다. 주변엔 비웃음과 비하의 평가로 가득하다. 이런 외부적인 요인으로 끝까지 버텨내던 결국 '내 안의 나'도 무너진다.
이런 극단이 아니더라도 대학 입시, 취업 및 승진, 사업, 투자 등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 부모님, 가족 등 바카라임져야 할 사람들에 대해 바카라임지지 못함. 슬롯 소속집단에서의 낮은 평판 등 다양한 '실패'가 두렵다.
우리로 하여금 '몰락'을 마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 '몰락' 자체가 아니다. 몰락을 두려워하는 그 '두려움'이 우리를 '몰락'에 마주하지 못하게 한다.
사실 '실패'해도 된다. 당신이 실패하더라도, 당신의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당신을 언급만 할 뿐이지, 당신의 삶에 그렇게 관심이 없다. 떠나가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부모님, 가족은 안타까워 하겠지만, 그들은 당신의 성취가 아닌, 당신 자체를 사랑한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찌할 것인가." 어찌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몰락'과 '구원'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몰락' 즉, '실패'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몰락'을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단단함을 키워야 한다. 이 단단함이 생겼을 때, 몰락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삶이 보인다. 내 삶을 강력하게 옥죄던 '우주'가 무너져 내리는 '몰락'은 패배나 끝이 아닌 ‘구원'의 시작이다.
찬란했던 푸른 잎들이 모두 떨어지는 겨울이 지나야, 새잎이 돋아나는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듯이, 몰락은 더욱 나다운 본질적 삶을 살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다. 몰락이 두려워 '알'속에 갇혀 자신을 갈아 넣던 애씀을 내려놓고, 몰락 뒤에 다가올 구원을 환대할 수 있는 단단함이 필요하다.
어느 철학자의 질문,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찌할 것인가." 이제 당황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조용히 대답해 보자. “어찌하겠는가. 기꺼이 이 알을 깨고 맞이할 구원의 삶을 기대할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