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다 얼마야?
10. 아무리 어려운 일도 10번쯤 하면 손에 익고 몸에도 익혀진다. 원래 다들 좋아하는 일은 조금 빨리 배우지 않나. 그렇게 익숙해지면 루틴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론 변하지 않는 것들이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똑같은 소식에 여전히 설레고 두근거리지만 조금 의연해졌다고 해야 하나. 권태 혹은 현타? 분명 더 멋진 말을 알았는데, 그게 뭐더라.
구태여 품을 들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 수 있는 일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에스엠 주주로서 분기별 공시 자료에서 최애들의 컴백 일정 확인하기. 공연 소식이 있으면 대관 장소를 추려 스케줄 맞추기. 티저 영상이 뜨면 콘서트 앞뒤로 연차 올리기. 마지막으로 티켓팅하는 날엔 무조건 약속 비우기. 이렇게 해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일 년에 두 시간 남짓. 이 모든 이유는 최애의 아이돌, 에스파(aespa)의 네 번째 단독 콘서트에 가기 위해서였다.
팔이 언제나 안으로 굽어서 눈을 가린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 이제 친구들은 내가 말없이 휴가를 내면 콘서트에 갔거나, 콘서트에 다녀와 집에서 글을 쓰고 있을 게 뻔히 보인다고 한다. 내 아이돌과 내 아이 둘. 서로 다른 휴가를 보낸 후에는 마땅히 후기를 공유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런데 이번 콘서트는 뭐가 제일 좋았냐는 질문에 팔짱 딱 끼고 "그냥 다 괜찮았어"라고 했다. 얘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얼굴을 못 본 척했다. 나는 그날도 분명히 다른 날처럼 에스파를 향해 그 팔을 힘껏 흔들었으면서도.
7년 차를 맞이해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에스파의 세계관이 콘서트에서 그 서사를 이어가며 오랜 팬들을 결속시킨다. 우리는 함께한 시간에 늘 다른 이름을 붙였다. 2023년 <HYPER LINE>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PARALLEL LINE>을 통해 서로의 세상을 평행 우주로 확장했고, 그 무한한 우주의 중심을 <aeXIS LINE>으로 잡았다. 그리고 이번 콘서트에는 그렇게 커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COMPLaeXITY>를 피하지 말고 함께 즐기자는 메시지가 담겼다.
육각형 아이돌이라는 수식어처럼 에스파는 언제나 꽉 찬 실력으로 공연장을 꽉 채운다. 요즘 아이돌 콘서트 티켓 가격은 보통 154,000원에서 시작한다. 공연 장소나 좌석 위치에 상관없이 가격이 같다 보니, 앞자리로 가기 위한 티켓팅이 더 치열하다. 에스파의 첫 단독 콘서트는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이틀 동안 열렸다. 그다음 콘서트가 두 번에 앙코르콘이 두 번, 작년에는 체조에서 3일 동안 했다. 올해 에스파는 고척돔에서 두 번 공연한다. 이걸 다 더하면 내가 에스파 콘서트에 쓴 금액이 나올 텐데, 날이 더워서 계산을 자꾸 미루게 된다.
VIP석은 본 공연 전 아티스트의 리허설을 볼 수 있는 사운드체크 참석 기회가 포함된다. 이번에 티켓팅을 너무 잘해서 처음으로 VIP 플로어석에 갔는데, 공연장에 일찍 도착하고도 한 시간 동안 입장을 기다려야 했다. 체력을 모두 녹인 후에 기대마저 녹여버리는 올여름 가장 뜨거운 햇볕이었다. 사운드체크는 3곡 진행했다. 이미 무대 음향도 완벽하고 에스파 멤버들도 공연 준비를 마친 것 같아서 15분 동안 딱히 뭘 체크했는지 모르겠더라. 이런 게 VIP라면 나는 앞으로 티켓팅 전에 체크할 것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사실 루틴을 지키는 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강렬한 오프닝 후 관객들을 몰입시키며 휘몰아치는 세션, 그 뒤로 이어지는 멤버들의 다국어로 된 짧은 멘트 타임. 콘서트의 스토리를 담은 VCR과 멤버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토롯코, 언제나 망하는 떼창 이벤트, 게스트와 관객들의 댄스 챌린지로 함께 채우는 퀵체인지. 그리고 마침내 앵콜. 콘페티가 잔뜩 쏟아지는 엔딩까지. 언제나처럼 완벽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런 완벽함 속에서 오히려 부족함을 느낀다.
셋리스트가 히트곡과 새 앨범의 수록곡, 에스파 멤버들의 미공개 솔로곡으로 풍부해졌지만, 이번 에스파 콘서트는 대기 시간도 길고, 무대의 비중이 늘었어도 가장 짧았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너무 My Plan대로 풀려서일까. 콘서트 첫날에 가져갔던 정체 모를 감정이 마지막 콘서트에서 콘페티를 가득 주워왔음에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게 사랑하나 보다. 늘 이렇게 문제를 다른 곳이 아닌, 나에게 달라진 게 있나 하는 고민으로 돌릴 정도로.
두 눈으로 공연을 직접 보는 것보다 영상을 찍어 실시간으로 SNS에 공유하는 것이 요즘 콘서트를 즐기는 방법이 되었다. 무대가 시작되면 모두 머리 위로 카메라를 올리고, 영상에 목소리를 담지 않기 위해 입을 닫는다. 다들 어떻게 무대와 전광판과 뷰 파인더를 동시에 보려는 걸까. 나도 따라서 찍었는데 다시 들여다보지 않고 그대로 보관함에 남는다. 내 거보다 더 좋은 카메라로 찍은 직캠 영상은 완벽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것보다 훨씬 느리고 삐뚤빼뚤하더라도 내 감정을 담은 내 글을 더 자주 들여다볼 것 같다.
일 년을 기다려 두 시간 남짓. 이 모든 노력을 10번 하고 나니 알 것 같다. 내 콘서트는 공연이 다 끝났다고 끝나지 않는다.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일부터 계획하기, 아무도 덕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덕질하기.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역시 내 사랑은 눈에서 멀어진다고 해서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그런 시시한 사랑이 아니었다. 다음엔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 계산은 어디까지 했더라. 일단 흥정은 붙여봐야겠지.
0원. 이쯤으로 불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