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용씩: 우렁차고 용감하고 씩씩하게
짝사랑 얘기는 아무래도 부끄럽다. 만약 그 주인공이 나라면 조금 더. 게다가 이만큼 나이를 먹고 여전히 아이돌 덕질을 하는 거라면 거기서 조금 더 부끄러워진다. 그렇지만 이건 틀림없이 사랑이다. 이렇게 모두가 보는 곳에서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아마 꽤나 중증인 듯하다. 레드벨벳 아이린(IRENE)의 첫 단독 콘서트, <아이윌(I-WILL)> 막콘에 다녀왔다. 그럼 빠빠빠- 빨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나의 짝사랑은 완벽함이 디폴트인 세상에 산다. 이 사랑은 무대 위에서도 뒤에서도 아규(argue)와 결함이 없어야 서로 당당히 주고받을 수 있다. 그리고 대개 뒷단에서 생긴 오류가 해결하기 어렵지 않나. 덕질은 내 몫이 아닌 성취에도 기쁨을 주지만,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나를 작아지게 한다. 나는 언제 이런 걱정 없이 이 아이를 맘껏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번 문제는 나보다는 아이린이 더 열심히 고민했나 보다. 아이린이 데뷔 10년, 12년 만에 선보인 두 개의 솔로 앨범의 키워드는 용기와 응원이었다.
하얀 얼굴이 가득한 앨범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서로 주고자 하는 것과 받고자 하는 것이 같았다. 더 다정해질 용기. 아이린에게 용기란 거창한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힘을 내 보는 것. 그 도전으로 새로운 취향을 찾아 나를 채우고, 그 과정 속의 나를 내가 가장 큰 팬이 되어 응원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아이린에게 자아성찰적인 선언이었으며, 오랜 시간 기다려준 러비(ReVeluv)들에게 선물이었고, 덕질로 세상을 배운 나에게도 꼭 맞는 위로였다.
그럼에도 아이린이 단독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의문과 의심이 전부 사라지진 않았다. 요즘 아이돌 공연은 크게 팬미팅, 팬콘서트, 콘서트로 나뉘는데, 나열한 순서대로 팬들과 아티스트가 소통하는 코너가 줄어들고 무대의 비중이 (가격도요!) 높아진다. 아이린이 발매한 솔로 앨범은 총 2장. 레드벨벳에서 주로 킬링 파트를 맡는 메인 래퍼이자 리드 댄서인 아이린은 어떻게 혼자 4천 석 규모의 장충체육관을 채울까.
그래서 아이린은 자신의 전부를 들고 왔다. 그동안 발표한 모든 곡을 무대에서 보여 준 것이다. 단단했다. 오랜 무대 경험, 짜임새 있는 세트리스트, 수없이 연습했을 퍼포먼스. 레드벨벳 아이린이 아닌 솔로 가수 아이린이 완벽하게 무대를 채웠다. 이번 아이린 콘서트의 콘셉트는 달이다. 오프닝 무대는 아이린의 솔로 데뷔곡인 <Like A Flower>로 시작해 <Summer Rain>, <Strawberry Silhouette>으로 이어졌고, 매혹적인 <Black Halo>와 <SPIT IT OUT>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공연 후반부는 <Ka-Ching>, <I Feel Pretty> 같은 (저의 최애곡이에요) 밝고 경쾌한 무드로 구성되었다. 아이린은 마치 시간에 따라 변하는 달처럼 2시간 동안 다양한 무대를 보여줬다.
공연장이 아이린이 좋아하는 보라색을 드레스코드로 맞춰 입고 온 러비들로 가득 찼다. 세션 중간중간 팬들에게 건네는 멘트에는 아이린의 진심과 긴장이 동시에 느껴졌다. 공연 둘째 날이라 어제보다 덜 떨었다고 (무척 귀여웠다) 하는데, 데뷔 12년 차가 되어도 여전히 긴장되고 무대에 욕심이 나는가 보다. 아이린은 이번 콘서트를 팬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직접 짬을 내서 응원법을 만들었다. 러비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아이린의 표정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비록 벼락치기를 했지만, 이번엔 나의 응원이 확실히 이 아이의 용기가 되었다.
오늘의 아이린은 레드와 벨벳도, 상징색인 핑크도 아닌, 콘서트 포스터 속 보라색 달을 닮았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뒤에 남모를 긴장과 불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 늘 밤을 환하게 비추지만 스스로는 빛나지 못하는 달처럼, 아이린은 어쩌면 그동안 팬들의 응원으로 용기를 내며 무대에 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밤보다 낮이 길어 공연이 끝나도 해가 지지 않는다. 하늘에 달도 보인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이 더웠지만, 나는 이 열기를 날씨로 기억하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 가득한 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아이린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콘서트였지만, 사실 내가 아직 기다리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아이린이 직접 가사를 쓴 노래다. 물론 지금도 곡 작업에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하며 가수 아이린의 디스코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리지 않은 아이린, 배주현의 이야기를 노랫말로 들려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결국 작사를 못 했다는 아이린의 말처럼, 완벽하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오래 고민하는 것이 나와 닮은 것 같다. 아이린이 가져올 다음 키워드는 뭘까. 그게 무엇이든 나는 한 줄의 가사면 아주 간단히 이 짝사랑을 계속할 텐데 말이다.
언젠가 아이린과 함께 오래 일한 SM엔터테인먼트 A&R팀이 아이린을 '같이 있어 주고 싶은 사람'이라 말했다. 혼자 두고 싶지 않다더라. 나도 그 이유를 감히 알 것 같다. 아이린은 꾸준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도 마치 생명력을 가진 꽃처럼 Like A Flower, 단단하게 자신을 피워낸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준 이들의 용기가 되겠다고 담담하게 응원한다. 그래서 나는 과연 아이린이 어디까지 피워낼지, 그 과정을 더 지켜보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I Will. 아이린의 우렁차고 용감하고 씩씩한 (우용씩!) <Biggest Fan>이 되어 아이린을 응원할 거다.
그리고 이렇게 덕후의 글에 다녀간 여러분이라면 조금 더 다정하게 아이린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린은 완벽함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서툴고 흔들려도 괜찮다고, 나의 불완전함을 나만의 완벽함으로 인정하자고 한다. 모두에게 완벽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을지언정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응원하려는 마음이 조금은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당신도 누군가를 응원해 본 적이 있지 않나. 그 이의 반짝이는 순간을 온전히 응원하는 마음은 언제나 그보다 환히 빛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