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 편 (상편)
<지난 줄거리 한 문장 요약>
새내기들이 선배들을 따라 어엿한 술귀신으로 거듭나는 풋풋한 성장 이야기~
<지난 이야기 전문>
https://fishingproductfr.com/@paleo/109
술에 절어 살던 우리들은 드디어 MT라는 걸 가게 되었다. 사실 당시엔 MT가 아니라 '모꼬지'라고 불렀지만 편의상 MT로 칭한다. 요즘은 MT를 간다는 말이 여친 혹은 남친과 모텔에 간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때의 MT는 청량리역에서 경춘선 기차를 타고 출발해 마석, 대성리, 강촌을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 과 동기들은 같은 날 대성리로 MT를 떠나는 선배들을 일부러 피해 한 정거장 떨어진 마석으로 결정했다.(선배들은 왠지 불편했기 때문)
MT라니, 세상에 말만 들어도 설레고 낭만이 넘치는 청춘의 로망이 아니던가? 고작 김밥쪼가리나 싸들고 떠나는 유년기 때 소풍과는 비교불가였다. 난 기대에 부풀었다.
우리는 아침에 청량리 역에 집결했다. 역전 광장에는 우리 과 말고도 타 학과, 다른 학교 팀들도 많았다. 이때 우리는 가장 먼저 눈여겨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주 맥주 술박스였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장대한 행렬의 술박스의 위용을 보면 '짜식들~ 술 좀 하는구나' 하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딸랑 한 두 박스 챙긴 걸 보면 '저걸 누구 코에 붙인다고' 라며 술부심에 이를 비웃기도 했던 것이다.
만약 외국인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생계를 위해 술을 팔러 가는 사람들의 행렬로 여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술귀신들을 태운 주류 운반 화물열차는 청량리역을 출발했다. 기타 치고 괴성을 지르고 박수 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만약 일반인이 같은 기차에 탑승했다면 끔찍한 소음 지옥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차에서 내렸을 때 맥주 몇 박스는 입가심용으로 벌써 사라진 뒤였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마당이 넓은 낡은 기와집이었는데, 조별로 인원을 나누어 큰 방 여러 개에 약 30명씩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일정의 첫 시작은 레크리에이션을 곁들인 술타임이었다. 여러 게임을 하다가 걸리면 벌주를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숙맥이나 음치들에겐 사실 술보다는 노래가 더 큰 고역이었다. 쭈뼛거리며 노래가 안 나오면 모두들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내 어깨를 봐~ 탈골 됐잖아~♪"
요즘은 이 노래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때 부르던 노래는 이게 아니었다.
동요를 개사한,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세요. ㅇㅇ이가 우리 집에 놀러 간 뒤에 우리 집 강아지가 애를 뱄어요. 아마도 ㅇㅇ이가 그랬나 봐요~♪"
그래도 안 나온다?
산할아버지를 개사한,
"X신같은 게 노래도 못하고~ 쪼다 같은 게 분위기 망치네~ 에라 X신아 나가 디져라~ 똥물에 빠져 디져라~♪"
이쯤 되면 누구라도 얼굴이 빨개져 울며 겨자 먹기로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노래를 못하는 나도 여러 번 걸려 악을 쓰고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그렇게 가벼운(?) 레크리에이션을 곁들인 에피타이저로 소주 몇 박스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다음은 점심식사를 위해 조별로 준비한 식재료를 꺼내 마당에서 요리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때 한 여학생이 상냥하게 웃으며 팔을 잡고 내게 물었다. "ㅇㅇ아, 너 요리 잘해?"
'요리라... 음 어릴 때부터 맞벌이 부모님 덕에, 이것저것 만들어 먹어야만 했던 슬픈 역사가 있어 내가 요리를 좀 하긴 하지...'
잠시 1년 후 미래로 타임슬립을 하겠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신병으로 전입하면 고참들이 으레 묻는 질문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이제 막 전입온 동기들에게 바로 그 질문이 나왔다.
무섭게 생긴 고참왈,
"똑바로 말해! 너, 뭐 잘해?""
신병 A "축구 잘합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 별론데, 축구 맨날 해야 할 텐데... 의무대 자주 가겠구나...'
신병 B "노래 잘합니다!"
또 속으로 생각했다. '한심하네... 시도 때도 없이 노래 일발 장전 하겠구나...'
신병 C "춤 잘 춥니다!"
'하아, 참 가지가지 하는구나...'
신병 D "없습니다!"
'아... 저건... 한 대 쥐 터지겠구나...'
신병 E "스포츠 마사지 잘합니다!"
'(흠칫 놀라며) 세상에... 저건... 나와 같은 호모사피엔스가 맞나?'
(이 친구는 훗날 손가락 관절염이 걸릴 정도로 마사지를 해야만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좀 전에 주위를 둘러보니 쉰내가 날 정도로 짬밥이 많아 보이는 고참 둘이 내무반 한구석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걸 보았다.
calculating...
'!!!'
신병 팔레오 "바둑 잘 둡니다!(당시 찐 5급)"
그 순간, 쉰내 쩌는 고참이 고개를 획 돌려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라? 바둑 잘둔다꼬? 일루 와봐라~"
이후 나는 바둑광인 고참과 신선놀음을 하느라 잡일도 덜었고, 까방권까지 획득했다.
쉴 시간을 일하는 시간으로 만드는 능지,
일 할 시간을 쉬는 시간으로 만드는 지능,
잔머리의 레베루를 느낄 수 있는가?
자 그럼 이제 다시 MT로 돌아오자. 잔머리에 빛나는 뺀질이 팔레오가 여학생에게 어떤 답을 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요리? 저~언혀~"
난 한 발치 떨어져 마루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맥주를 마시며 남들이 만들어주는 음식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슬슬 눈에 거슬리는 장면들이 들어왔다. '응? 된장찌개에 파를 썰지도 않고 뭉태기로 넣네', '세상에 두부를 저렇게 썬다고?', '물을 도대체 얼마나 넣는 거야?', '된장찌개에 설탕을 왜?'
결국 참다못한 나는 슬슬 간섭을 하다가 이윽고 팔을 걷어붙이고는 어느새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뺀질이라도 맛없는 밥을 먹기가 농땡이보다는 더 싫었던 듯하다.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말이 자유시간이지 사실은 또 술타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알코올 치사량을 넘어선 여러 동기들은 식후 혈당 스파이크까지 겹쳐졌는지 이미 저세상 취침 중이었다.
알다시피, 술병에는 여러 경고문이 붙어져 있다.
'지나친 음주는 임산부의 건강에 해로우며...'
'지난 친 음주는 실제보다 이성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합니다.'(사실 이건 구라임)
그랬다. 술이 들어가다 보면 실제보다 이성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1편에 나온 박ㅇㅇ, 입에서 용암을 뿜어내었던 녀석은 그새 좋아하는 여자가 한 명 더 늘어있었다. 근데 순진한 그 친구는 그걸 대놓고 입으로 말했었다. 제1지망은 이ㅇㅇ이고, 제2지망은 김ㅇㅇ이라고~
그걸 알게 된 제1지망, 제2지망은 둘 다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름 꿋꿋한 친구였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방치했다간 결국 끔찍한 '연쇄고백마'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조기치료 혹은 전문기관의 돌봄이 필요했을 터이나, 짓궂은 나는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
"(먹고 남은 찌개를 가리키며) 자 이게 제1지망이야, (대접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며) 자 이게 제2지망이야. 둘 중에 네가 선택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를 골라 완샷 하면 내가 다리 놔줄게. 내가 둘 다 친한 거 알고 있지?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이에 한참을 고민하다, 그 녀석은 찌개를 선택해 완샷 했다. 역시 남자에겐 첫사랑이 강력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놀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둥근달이 떠올랐다. "술잔에 비친 달이 하나요, 그대 눈동자에 비친 달이 두 개니 3개의 달이 떴구나!" 라고 닭살 돋는 멘트를 질러대며 그렇게 우리들의 낭만의 밤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통기타와 함께 노래도 부르며 우리의 낭만은 끝없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갑'은 꽃다지의 '전화카드 한 장'이었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며 눈물이 터졌다. 그 노래가 당시 운동권 가요임을 감안해도 참 감성적이긴 하지만, 정작 그때는 그 놈의 술 때문이었을 걸로 생각한다.
https://youtu.be/NDX4ucttpfQ?si=Q80gF1w31xKo_BGz
그러다가 밖에서 때 아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모두를 놀래켰다.
"아니, 이 시간에 대체 누가?"
- 다음 편에 계속 -
원래 한 번에 완결을 하려고 했으나 게으름병이 아직 완치되지 않아 부득이 2편으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