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27] 2부, 많아진 것과 귀해진 것
앞선 글에서 《트렌드 코리아 2027》이 말하는 소비자의 변화를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일하는 사람과 조직의 변화를 짚어보려 합니다. AI를 쓰는 사람이 늘었는데, 그만큼 회사가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이번에 소개된 ‘해봄경제’는 꽤 반가운 개념이었습니다.
거창한 준비 없이도 일단 만들어보고, 결과를 보며 고쳐나갈 수 있는 환경이 열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픈 반려견의 식사와 투약을 기록할 간단한 페이지를 AI로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지요.
이전이라면 필요한 앱을 찾아 기능에 맞춰 쓰거나 누군가에게 제작을 부탁했을 법한 일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작은 불편에서 출발해 직접 도구를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창업과 신사업 기획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디어를 검토한다며 몇 주씩 문서를 고치던 일도, 일부는 작동하는 화면이나 간단한 시제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말로 설명할 때는 다들 고개를 끄덕이지만, 막상 화면을 앞에 두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어디서 막히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정말 쓸 의향이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다만 만드는 비용이 낮아졌다고 검증 비용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AI가 만들어준 페이지가 실행된다는 사실은 기술적인 출발선에 섰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실제 고객을 만나고, 오류를 수정하고, 개인정보와 운영 비용을 챙기는 일은 그 뒤에 남습니다.
오히려 시도가 쉬워진 만큼 더 일찍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이번 실험에서 무엇을 확인하면 계속하고, 무엇이 나오면 그만둘 것인가. 그 기준이 없으면 해봄경제는 금세 ‘만들어본 것’만 쌓아두는 경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장인류’도 처음에는 개인의 습관을 설명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게시물을 저장하고, 언젠가 읽을 자료를 쌓아두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조직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훨씬 현실적인 문제가 보입니다.
회사에는 이미 자료가 많습니다.
몇 년치 회의록과 제안서, 고객 문의,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가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입니다.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이 퇴사했거나 다른 팀으로 옮겼다면, 새 담당자는 같은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자료는 분명 있는데 어떤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 찾기 어렵습니다.
AI를 붙인다고 곧바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최신본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고, 같은 고객을 서로 다른 이름으로 관리하며, 실패한 이유가 빠진 문서라면 검색은 빨라져도 판단은 나아지기 어렵습니다. 접근 권한을 구분하지 않고 자료를 한곳에 모으는 일은 보안 문제까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의 AI 활용은 좋은 프롬프트를 공유하는 데서 끝나기 어렵습니다. 같은 업무를 다음 사람이 맡아도 앞선 판단을 이어갈 수 있도록 기록의 방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바이브 워킹’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실무자가 AI로 보고서를 만들고, 관리자는 AI로 그 보고서를 검토합니다. 다시 내려온 피드백을 실무자가 AI로 수정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각자 일을 빨리 처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가는 문서와 확인 단계는 여전합니다.
조금 과장된 이야기 같아도 낯설지는 않습니다.
문서 작성 시간이 줄어든 만큼 보고서의 종류가 늘 수도 있고, 작성자가 절약한 시간이 검토자의 추가 요구로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얻은 시간을 조직이 그대로 돌려받는다고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맥킨지가 2025년 발표한 글로벌 AI 조사에서도 비슷한 간극이 드러납니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조직에 속한 응답자 가운데, 적어도 일부 업무 흐름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했다고 답한 비율은 21%였습니다. 또 응답자 80% 이상은 생성형 AI가 기업 전체 영업이익(EBIT)에 미친 뚜렷한 효과를 아직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조사 결과만으로 업무 재설계가 이익을 만든다는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도구 사용이 조직의 성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생각해볼 만합니다.
이제 팀장이 확인해야 할 숫자도 조금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보고서 한 장을 작성하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라 요청부터 최종 결정까지 걸린 시간을 보는 것입니다. 자료가 몇 번 되돌아왔는지, 같은 확인을 다른 부서에서 반복했는지, 결과적으로 비용이나 오류가 줄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모든 승인 단계를 없애자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계약, 재무, 개인정보처럼 바카라임이 큰 업무에는 검토가 필요합니다. 다만 왜 그 확인이 필요한지, AI가 도울 부분은 어디까지인지, 마지막 결정을 누가 내릴지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도구만 새로워지고 일의 순서는 그대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번 마지막 키워드인 ‘안목자본’은 앞의 이야기들을 다시 묶어주었습니다.
강연자는 같은 AI를 사용해도 결과물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로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구별하는 눈을 들었습니다.
글을 쓸 때를 떠올려봐도 그렇습니다. AI는 문장을 더 매끄럽게 다듬고 빠진 항목을 채워줍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확인하지 않은 내용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숫자의 출처가 맞는지, 사례가 주장에 정말 필요한지, 읽는 사람에게 남겨야 할 판단이 무엇인지는 작성자가 살펴야 합니다.
‘휴먼엣지’라는 개념도 여기에서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
사람이 애썼다는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 가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AI가 쓴 글에 일부러 오타를 넣거나 사람 손으로 전부 만든 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어떤 자료를 확인했고, 무엇을 고쳤으며, 어떤 판단을 바카라임졌는지 설명할 수 있는 편이 더 오래 신뢰를 얻을 것입니다.
안목은 처음부터 타고나는 감각만은 아닐 겁니다. 결과를 보고 자기 기준으로 평가해보고, 다른 사람의 판단과 비교하고, 시간이 지난 뒤 실제 성과를 다시 확인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입니다. AI가 쉽게 답을 내놓을수록 그 과정을 건너뛰고 싶은 유혹도 커질 것입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7》의 표제어는 ‘ALPHA SHEEP’입니다. 무리에서 먼저 벗어나는 양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강연에서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일 용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제게는 그 말이 무작정 먼저 뛰어가라는 주문으로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빠르게 시도할 수 있습니다. 회사 안에도 새로 만든 시제품과 자동화 도구, AI가 작성한 문서가 쌓일 것입니다. 그중 무엇을 계속하고 무엇을 접을지 정하지 못한다면 속도는 오히려 부담이 됩니다.
앞으로의 차이는 누가 더 많이 만들었는지보다, 만들어본 뒤 무엇을 바꿨는지에서 드러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