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코리아 2027] 1부, 많아진 것과 귀해진 것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잠깐 멍하니 앉아 있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엔딩 음악을 듣는 몇 분까지 영화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 틈에 다음 작품을 권합니다.
지난 10월 14일 들은 《트렌드 코리아 2027》 강연에서 유독 기억에 남은 장면입니다.
추천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취향에 맞는 작품을 너무 잘 찾아주기에 생기는 일입니다. 볼거리는 넘치는데 여운은 짧아지는 역설. 강연에서는 이를 ‘권태슬롯’라는 키워드로 풀어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업 현장의 고민이 떠올랐습니다. 커머스와 플랫폼 사업에서 신규 고객 유입은 숫자로 나타납니다. 광고비를 쓰면 방문이 생기고 쿠폰을 주면 첫 구매가 일어납니다. 그다음이 어렵습니다. 첫 구매를 마친 사람이 다시 찾아올 이유까지 광고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상품은 늘고 추천은 정교해졌습니다. 그런데 소비자가 한 브랜드와 오래 관계를 맺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워졌을까요.
《트렌드 코리아 2027》이 제시한 ‘권태슬롯’는 할 일이 없어 심심한 상태와 조금 다릅니다. 하루는 바쁘고 즐길 거리도 많지만, 정작 다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희미해지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과거에는 보고 싶은 드라마가 방영되는 요일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은 보고 싶은 작품을 언제든 골라 볼 수 있습니다. 선택지가 많아져 얻는 편익은 큽니다. 다만 선택의 편리함이 경험의 만족까지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커머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들어온 고객에게 신상품을 보여주고, 내일은 할인 알림을 보내고, 모레는 다른 기획전을 권합니다. 방문과 클릭은 늘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난번 구매에서 고객이 무엇을 좋게 느꼈고 어떤 불편을 겪었는지는 놓치기 쉽습니다.
이럴 때 기업은 종종 더 강한 자극을 답으로 선택합니다. 방송을 더 자주 하고, 혜택을 더 크게 주고, 상품 수를 더 늘립니다. 경쟁사가 똑같이 따라 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고객이 그 브랜드를 떠올릴 이유는 선명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권태가 곧 모든 소비자의 무관심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기다리고, 마음에 드는 경험에는 시간을 씁니다.
그렇다면 기업이 살펴야 할 것은 자극의 양보다 무엇이 고객의 기대를 만들어내는가일 것입니다.
소개된 또 하나의 키워드는 ‘라이프 ROI’였습니다. 기업이 투자 대비 수익률을 계산하듯, 소비자도 자신의 시간과 노력, 관계에 들인 자원이 합당한 결과로 돌아오는지 따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기준을 가격 비교 정도로 이해하면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고객이 상품 하나를 구매하기까지는 생각보다 여러 비용이 듭니다. 검색 결과를 넘겨보는 시간, 후기를 읽는 수고, 배송을 기다리는 불확실성, 마음에 들지 않아 반품할 가능성까지 있습니다. 싼 가격에 샀어도 그 과정이 피곤했다면 소비자는 그 거래를 좋은 선택으로 기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최저가가 아니어도 상품 정보를 믿을 수 있고, 선택이 쉬우며,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이 빠르다면 다음에도 같은 곳을 찾을 이유가 생깁니다. 소비자가 계산하는 수익률의 분모에는 돈 외의 것들이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연의 ‘폼팩터 시프트’도 연결됩니다. 가령 여행할 때 부피와 액체류 반입 문제를 덜어주는 고체 치약은 치약의 역할 자체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제품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귀찮은 일을 줄여줍니다. 기능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보다 사용 과정의 작은 마찰을 없애는 편이 더 설득력 있는 혁신일 때가 있습니다.
사업을 기획할 때도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상품은 고객에게 무엇을 더 주는가.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일을 덜어주는가. 후자의 질문이 구매 경험을 바꿉니다.
‘리:텐션 전략’은 이번 강연에서 제가 특히 사업의 언어로 다시 생각하게 된 키워드입니다. 새로운 고객을 계속 데려오기보다 기존 고객이 스스로 머물고 돌아오게 하자는 방향입니다.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장면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용한 고객보다 처음 가입한 고객이 더 좋은 혜택을 받는 경우입니다. 기업으로서는 신규 고객 획득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고객 입장에서는 오래 이용했다는 이유로 오히려 손해를 보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런 접근을 바꾸려는 움직임도 보입니다.
LG유플러스는 2026년 2월, 5년 이상 이용 고객을 위한 선물과 문화·여가 혜택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장기 고객 등을 대상으로 한 체험형 행사도 알렸습니다.
실제 이탈률 개선 효과는 별도 데이터로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기존 고객에 대한 투자가 할인에만 머물지 않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역체감’이라는 표현도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다른 서비스를 이용해 보고 나서야 예전 서비스의 편리함을 깨닫는 경험입니다.
이를 고객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와 혼동해서는 곤란합니다. 해지하기 어렵게 만들면 당장의 이탈은 줄일 수 있어도 좋은 기억을 남기기는 어렵습니다. 서비스가 편하고 문제를 믿고 맡길 수 있기에 자발적으로 돌아오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는 이 차이를 숫자로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의 매출이 궁금하다면 첫 구매 전환율을 봐야 합니다. 그러나 브랜드의 경쟁력이 궁금하다면 두 번째 구매까지 걸린 시간과 재구매율을 함께 봐야 합니다.
쿠폰을 제공했을 때만 구매한 고객과 혜택 없이 다시 찾아온 고객도 같은 고객군으로 묶기 어렵습니다. 재구매율의 측정 기간은 상품별 구매 주기에 맞춰야 합니다.
여기에 고객이 주변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추천하는 순간까지 연결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광고비를 더 쓰지 않아도 새로운 고객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추천 수 자체보다 추천받아 들어온 사람이 실제로 만족하고 다시 이용하는지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호감과 성과는 구분해서 봐야 합니다.
‘하프시그널’은 중년의 갱년기를 인생의 끝이 아닌 새로운 절반의 신호로 바라보자는 개념이었습니다. 저는 이 키워드가 소비자를 나누는 방식에도 힌트를 준다고 느꼈습니다.
가령 같은 50대라도 자녀 양육에 시간을 쏟는 사람, 부모 돌봄을 시작한 사람, 자신의 건강과 취미에 더 투자하는 사람의 일상은 다릅니다. 이들을 하나의 ‘중년 고객’으로 묶으면 실제로 해결해야 할 불편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와 성별보다 지금 겪는 생활 과업을 함께 봐야 제안이 구체적이 됩니다.
이 역시 라이프 ROI와 닿아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비용 절감이, 누구에게는 시간을 되찾는 일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번거로운 결정을 대신 정리해 주는 일이 더 큰 가치일 수 있습니다. 같은 혜택을 모든 고객에게 뿌리는 방식으로는 이런 차이를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강연이 끝난 뒤에도 ‘권태’라는 단어가 오래 남았습니다.
좋은 상품과 콘텐츠가 넘치는데 쉽게 싫증을 느낀다는 설명은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곱씹어 보니 소비자가 까다로워졌다고만 여겼던 장면들을 다르게 보게 됐습니다.
기업은 고객을 데려오기 위해 많은 비용을 씁니다.
신규 유입을 늘리는 일은 앞으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첫 구매를 만든 혜택이 사라졌을 때도 고객이 돌아오는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번 처음 만나는 고객을 위해 같은 비용을 치르게 될지 모릅니다.
상품이 많아진 시대에 브랜드가 고객의 관심을 계속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대신 지난 경험이 다음 선택의 이유가 되도록 만들 수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