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은 돈을 좋아합니다.
용돈이 생기면 쓰는 것보다 모아두는 걸 먼저 생각합니다.
저를 닮은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명절에 세뱃돈을 받아도 당장 뭔가를 사겠다고 조르는 법이 없었습니다. 지갑에 넣어두거나, 저금통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내심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아두는 것과 불리는 것은 다른 일이니까요.
돈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조금씩 떨어집니다.
오늘의 만 원과 10년 뒤의 만 원은 같은 만 원이 아닙니다. 쓰지 않고 모아만 두면 안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걸 꽤 늦게 알았습니다. 아들은 저보다 일찍 알았으면 했습니다.
좋은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여주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어느 저녁, S&P 500 지수의 30년 그래프를 꺼냈습니다.
"아들아, 이거 봐봐. 미국 주식이 이렇게 장기적으로 두면 계속 올라. 중간에 많이 떨어진 것도 보이지? 그래도 결국엔 다 올라왔어. 네가 모은 용돈도 여기에 넣어두면 어떨까?"
아들은 말없이 그래프를 한참 바라봤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방으로 뛰어갔습니다.
잠시 후, 저금통에서 5만 원짜리를 몇 장 꺼내 들고 돌아왔습니다.
"아빠, 이걸로 나도 주식 사줘."
"응, 알았어."
저는 그 말이 왠지 좀 웃겼습니다. 그리고 조금 뭉클했습니다.
며칠 전 개설해 둔 아들 이름의 주식 계좌로 돈을 이체했습니다.
매수 버튼을 누르려는데, 손이 잠깐 멈췄습니다.
미국도, 한국도, 모든 지수들이 사상 최고를 향해 있었습니다. 저 역시 나름 오랫동안 투자를 해왔고 나쁘지 않은 수익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아들 돈으로 새로 사려니 고점이라는 느낌이 뚜렷하게 들었습니다.
내 돈이었다면 이렇게 망설였을까요.
아마 그냥 샀을 겁니다.
아들 돈이라서 더 신중해졌습니다. 더 무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무게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제가 처음 투자를 시작할 때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습니다.
잠깐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이 돈은 최소 10년, 어쩌면 그 이상 묵혀둘 돈입니다. 오늘의 주가가 10년 뒤에 어떤 의미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가가 내려가면 더 싸게 살 기회가 오는 것이고, 오르면 이미 잘 산 것입니다. 고점이 두려워 시작을 미루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싼 실수라는 걸, 투자를 하면서 몸으로 배웠습니다.
눈 딱 감고 매수 버튼을 눌렀습니다.
지금은 작은 돈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시작이 아들에게 무언가를 남겨줄 거라 믿습니다. 잔고가 오르내리는 걸 보면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당장의 숫자에 흔들리지 않고, 긴 흐름을 보는 눈을 가졌으면 합니다. 저금통에 모아두는 것도 좋은 습관이지만, 그 돈이 시간과 함께 자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으면 합니다.
나중에 아들에게 목돈이 필요한 순간이 올 겁니다. 대학, 첫 차, 첫 집, 아직 모르는 어떤 꿈. 그때 이 계좌가 조용히 아들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저금통에서 꺼낸 5만 원짜리 몇 장이, 그 긴 여정의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아이에게 돈 모으는 법은 가르치기 쉽습니다. 불리는 법을 가르치는 건 저 역시 아직 배우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