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모계슬롯
평범한 수요일 아침, 아이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먼저 일어나 주방에서 아이를 맞이하거나, 아침에 우렁차게 깨우는 전형적인 엄마와는 다른 모습이다.
"일어나자, 아들. 50분이야."
"엄마, 5분만."
아는 맛이다. 달달한 잠, 아침잠은 더 달다. 나도 5분만 더 눕고 싶지만 계속 움직인다.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머리를 고쳐 묶었다. 나도 5분만 하다가 9시까지 자서 지각하게 했던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언제쯤 '경이로운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냐고?
묻는다면, 전체적인 평가가 그렇다는 것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답하고 싶다.
아주 완벽한 순간은 일상과 섞여 자체로 '엄마'라는 감투가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밑바닥끝에서 언제나 경이로운 햇살 같았다.
편재의 다정하지 않은 세상을 원망하는 순간이 있었다.
모두 같지 않아서 이해하기 힘들고, 모두 다르지 않아서 이해받기 힘들었다.
대체로 서로를 향한 일이라서 쉽지 않다. 누군가는 식상인 나의 장황함이 번거로울 것이고, 누군가의 맥락 없는 핵심요약이 무심하게만 느껴지곤 한다. 생각들이 담쟁이처럼 서서히 일상에 파고들면 숨 쉬는 게 고통 같다.
놓거나 끊고 싶어진다. 그게 사람간이든, 일이든, 자신이든 말이다.
깊이와 높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순식간에 찾아오면 스스로도 무서워진다.
우리 집은 반만 거실확장을 했다. 방문과 똑같은 문이 거실과 베란다사이에 있다.
'분리'라는 게 어떤 때에는 누군가의 쾌적함을 위해 내가 불쾌해야 하는 것만 같다.
거실에 바람이 들어갈까 봐 베란다 문을 닫고 빨래를 널었던 날이었다.
모두 고요히 자고 있는데 나만 노동이 가득한 삶, 아침 진분홍 노을이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창에 가까이 다가가서 아래를 내려봤을 때, 문을 열고 싶었고, 바람을 온몸으로 맞길 바라기도 했었다.
엄마가 없는 순간에 아이는 엄마를 찾는다. "엄마, 어디 있어?"
아주 먼 미래를 떠올리면 몸은 없어지겠지만, 누군가에게 이름이나 행동으로 남을지 모를 일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나, 저주한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남는지'가 중요했다.
그렇게 잘 견디고 또 겪고를 반복한다.
미어터지는 마음들이 지겨워지면, 파괴하고자 하는 못된 성미가 움튼다. 빅뱅에 갑자기 나타난 돌산을 전부 깨부수고 태초의 들판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들 때면, 떠올린다. 이 세상은 결국 모계슬롯다.
드라마 '아들과 딸(최수종, 김희애 주연, 1992~1993)'에서 엄마는 참 너무했다. 본인도 여자면서 아들이 가장 귀하고, 주인공처럼 대한다. '엄마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엄마도 참 힘든 인생인데, 그저 그릇이 작아서 다 담지 못했을 뿐인데. ㅡ 그래도 자기 깜냥을 딸이 치를 이유는 없었다.
'오은영 박사의 금쪽 상담소'의 몇몇 가정에서 아이들만 따로 인터뷰하는 장면들에서, '엄마가 그때 참았으면, 우리는 여전히 잘 살고 있을까?'라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봤다. 어찌 엄마만 잘못했을까? 엄마만 참아야 할까? 그러나, 상처받은 아이들이 그저 느끼는 대로 이야기할 뿐이었다. 이혼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우주가 무너지는 까르마를 준다. 그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참자'에서 마음이 심해로 떨어졌다.
'알래스카 새아빠 학대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인생'이라는 주제로 유튜브 영상*을 본 적 있다. 4살 때부터 학대인지도 모르고 당해왔고, 커서는 탈출해서 범죄로 겨우 살았다. 범죄를 반복하던 삶, 아동성범죄자들을 응징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다. 퇴소 후 자신과 같은 아이들에게, 이 시대의 본보기로 범죄자가 아닌 올바른 인생을 살아내도록 권고했다. 이 사건의 내용에서 내가 집중한 것은, '엄마'였다.
아이들을 지키지 않은 엄마가 죄질이 가장 나빠보였다.
극성맞은 진상엄마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한다.
물론 상식을 넘어서 남에게 피해 주면서 아이를 키우면 진상이 된다.
불합리함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아이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어른으로서 당연히 하는 것은 절대 진상이 아니다. 상처를 아주 안 받을 순 없지만, 순응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것도 엄마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선생님께 멍들도록 맞고와도 말도 못 했다. '폭력'이 '교육'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달랐다. 시시비비를 따졌다.
한 번은 남동생이 학교에서 따귀를 맞고 얼굴에 손자국이 있는 채로 왔다.
알고 보니 퉁퉁한 남동생 몸 일부를 동기생 여자애가 공개적으로 놀려서, 남동생이 때렸다는 것이다.
앞뒤 사정을 모르고, 여학생을 때렸다는 이유로 옆반 선생님이 남동생의 따귀를 때렸다.
바로 학교로 찾아가고 때린 선생님에게 사과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그 동기 여자애 엄마까지 집으로 찾아와서 아이와 함께 사과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만 있을까?
우리 남매 대신 싸운 엄마의 이야기는 아주 많다.
나도 그런 엄마를 닮아서 '아이에게는 무례해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정확하게 집어 이야기한다. 그게 설령 아주 노련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말한다.
'얘도 크면 어른이 됩니다. 보고 배워요. 행동거지 조심하세요.'라고.
내가 지킬 게 있으니까 다정하지 못한 세상에 남아있구나, 싶어서.
결국 모계슬롯에서 살아남았나 싶어서.
경. 이. 롭. 다.
>> 다음 이야기 예고. 부모의 자리 월주, 식신기둥을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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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영상. 밋돌세님 영상 :https://youtu.be/xIZOxNqIKC4?si=KdPpzqxZJwWGnkV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