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씨앗, 문명을 묻다 19
농사에서 씨앗을 남기는 일은 수확이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 다음 해에 심을 씨앗을 골라내고, 종류별로 나누어 담고, 파종할 때까지 상태를 살펴야 한다. 씨앗은 밭에서 자라지만 다음 농사를 준비하는 일은 집 안팎의 여러 공간에서도 이루어진다. 씨앗을 펼쳐 놓을 자리가 필요하고, 조금씩 나누어 담을 용기가 필요하며, 다른 곡식이나 생활용품과 섞이지 않도록 둘 곳도 있어야 한다. 농민이 씨앗을 보존해 온 역사는 특별한 종자 보관 시설의 역사만이 아니다. 일상에서 쓰던 도구와 공간을 다음 농사에 맞게 활용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함지박은 씨앗을 펼쳐 놓고 살펴보는 데 쓸 수 있다. 한곳에 모인 씨앗을 넓게 펴면 쭉정이나 이물질을 가려내기 쉽고, 크기와 색깔이 다른 씨앗도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도구는 씨앗을 다루는 작업을 돕지만, 선별과 보관은 서로 다른 일이다. 함지박에서 씨앗을 골랐다고 해서 그대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씨앗의 상태를 살핀 뒤에는 충분히 말리고, 종류에 따라 알맞은 용기에 옮겨 담아야 한다. 집에 있는 도구를 활용하더라도 각 도구가 맡는 역할은 구별해야 한다.
작은 양의 씨앗은 종이봉투나 주머니에 나누어 담을 수 있고, 병이나 통은 여러 종류를 구분해 두는 데 쓰일 수 있다. 용기의 선택은 씨앗의 양과 크기, 보관할 장소, 농가에서 마련할 수 있는 물건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농가가 같은 도구를 사용한 것도 아니며, 시대가 달라지면서 집에서 구할 수 있는 용기도 달라졌다. 전통적인 생활 도구와 오늘날의 재활용 용기를 한 시대의 풍경처럼 섞어 설명해서는 안 된다. 씨앗을 보관하는 생활은 오래된 관습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살림살이 속에서 필요한 방법을 찾아온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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