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인간의 삶 49
룻은 남편을 잃었다. 시어머니 나오미도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다.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서로뿐이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룻에게는 모압으로 돌아갈 길이 있었다. 나오미는 룻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남편을 잃은 젊은 여자가 굳이 낯선 땅까지 따라올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를 따라갔다. 자신이 태어난 땅을 떠나 시어머니가 돌아가는 땅으로 함께 갔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나오미에게는 돌아온 고향이 있었지만 룻에게는 처음 보는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룻은 모압에서 온 여자였다. 남편을 잃은 과부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베들레헴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집도 밭도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룻은 밭으로 나갔다.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주워 양식을 마련했다. 성경은 룻이 누구의 밭인지 미리 알고 들어갔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가 들어간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다. 보아스는 룻이 누구인지 알았다.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온 여자라는 것도 들었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룻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게 했다. 룻은 다른 사람들의 밭에서 이삭을 줍던 처지였지만 그곳에서 함부로 쫓겨나지는 않았다.
룻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기회가 아니었다. 그날 먹을 곡식이 필요했고, 다음 날에도 다시 일할 수 있어야 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일은 먼저 하루를 버티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신들과 가까운 친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가족의 재산과 이름을 이어가는 일에는 친족 사이의 바카라임이 따랐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도록 했고, 룻은 그 말을 따랐다.
보아스는 룻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보다 가까운 친족이 한 사람 더 있었다. 먼저 그 사람에게 바카라임을 맡을 뜻이 있는지를 물어야 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재산에 문제가 생길 것을 염려하여 그 일을 맡지 않겠다고 했다. 그 뒤 보아스가 그 바카라임을 받아들였다. 룻은 보아스와 혼인했고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오벳이었다.
여기까지 읽으면 룻의 이야기는 안정된 결말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남편을 잃었던 여인이 다시 가정을 이루었고, 아이를 낳았으며, 나오미도 손자를 품게 되었다. 처음의 상실과 비교하면 삶의 모양이 크게 달라졌다.
그러나 룻이 베들레헴에 들어온 순간부터 오벳이 태어난 순간까지 그의 삶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남편을 잃은 일은 룻이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간 일은 룻의 선택이었다. 밭에서 이삭을 주운 일은 살아가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이었다.
사람의 삶에는 스스로 선택한 일과 선택할 수 없었던 일이 함께 놓인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가족을 만났는지는 처음부터 정할 수 없다. 그러나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누구 곁에 설 것인지,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어느 정도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룻에게 베들레헴은 선택으로 들어간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들어왔다고 해서 곧바로 그 땅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태어난 곳도 다르고, 이전에 살던 가족도 다르고, 말과 풍습도 달랐을 것이다. 새로운 곳에 들어가는 사람은 흔히 먼저 자신의 출신으로 불린다. 룻에게도 ‘모압 여인’이라는 이름이 따라다녔다. 그 말은 그의 현재 모습보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먼저 설명한다.
사람을 출신으로 부르는 일은 간단하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면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사람의 출신은 그 사람이 살아온 전체가 아니다. 룻에게 모압은 태어나고 살아온 땅이었다. 그곳에는 남편과 함께했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남편을 잃은 기억도 있었을 것이다. 베들레헴으로 건너왔다고 해서 그 시간이 몸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곳에서 산다고 해서 이전의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이사할 수 있지만 기억까지 옮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지만 이전의 가족관계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룻이 베들레헴에서 얻은 것도 바로 그런 여러 시간이 겹쳐진 자리였다. 그는 모압에서 온 사람이면서 베들레헴에서 사는 사람이 되었다. 나오미의 며느리이면서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오벳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름이 하나씩 늘어났다고 해서 앞의 이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새로운 관계를 얻을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딸이 아내가 되고, 아내가 어머니가 되며, 누군가는 온라인 게임에서 새로운 직함을 얻는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한 사람을 완전히 대신하지 못한다.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머니라는 역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직함이 생겼다고 해서 그 사람이 직함보다 먼저 살아온 시간을 잃는 것도 아니다.
룻기의 마지막에는 족보가 나온다.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가 되고,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가 된다. 룻의 이름은 다윗에게 이어지는 계보 안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룻의 이름은 뜻밖의 위치에 놓인다. 모압에서 온 한 여인의 이름이 이스라엘 왕의 계보에 들어간 것이다. 성경은 그 사실을 짧은 족보로 기록한다. 하지만 룻이 베들레헴으로 떠날 때 자신이 훗날 다윗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때 룻이 선택한 것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일이 아니었다. 나오미를 혼자 보내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순간의 의미를 훗날의 결과까지 알고 선택하지 않는다. 어떤 만남이 오래 이어질지 모르고, 어떤 이사가 평생의 삶을 바꿀지도 모른다. 그때는 단지 오늘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내린 선택이 시간이 지나 전혀 다른 의미를 얻기도 한다. 룻에게도 그러했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은 한 과부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훗날 그 길은 왕의 계보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룻의 삶을 다윗의 조상이라는 결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게 읽으면 룻이라는 한 사람이 역사적 인물을 낳기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보다 룻에게 실제로 길었던 것은 그 족보에 적히지 않은 날들이었을 것이다.
밭에서 이삭을 줍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나오미와 함께 식사를 준비한 날도 있었을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날도 있었을 것이고, 보아스와 집안일을 의논하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날들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람의 삶에서 기록되는 사건은 몇 개뿐이고, 실제 삶의 대부분은 이름을 남기지 않는 날들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특별한 사건을 오래 기록한다. 왕이 태어나고 나라가 바뀌고 전쟁이 일어난 일은 족보와 연대기에 남는다. 반면 한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의 일을 마치는 장면은 대부분 기록되지 않는다. 룻도 그런 날들을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삶을 알 수 있는 것은 몇 장면뿐이다. 남편을 잃은 일, 나오미와 베들레헴으로 간 일, 밭에서 이삭을 주운 일, 보아스와 혼인한 일, 오벳을 낳은 일이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룻은 계속 살아야 했다. 한 번 새로운 관계를 얻었다고 해서 매일의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혼인을 하면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이름을 얻지만 그 이름만으로 함께 사는 방법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돈을 어떻게 쓸지 정해야 하고, 일을 나누어야 하며, 서로 다른 습관을 맞춰야 한다. 아이를 낳은 뒤에도 부모가 되는 일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가 아프면 돌봐야 하고, 자라면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걸어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관계를 설명하지만 그 관계를 살아가는 시간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룻이 베들레헴에서 얻은 것도 완성된 삶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가족을 얻었지만 그 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일을 다시 배워야 했다. 모압에서의 삶과 베들레헴에서의 삶이 한 사람 안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낯선 땅에서 산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그곳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매일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그곳에 시간이 생긴다. 장소는 주소만으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보낸 날들로 익숙해진다. 룻에게도 베들레헴은 그렇게 달라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나오미 때문에 따라간 낯선 곳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이 있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낳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날이 쌓이면서 베들레헴은 룻 자신의 삶이 들어 있는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압이 완전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은 새로운 장소가 이전 장소를 밀어내는 방식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지나온 곳과 현재의 곳이 함께 남아 사람의 기억과 관계를 이룬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일도 비슷하다. 낯선 사람이 우리 곁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이전 삶까지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되고, 어떤 상실을 겪었는지 듣게 되면서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룻은 보아스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는 모압에서 온 여인이었고, 나오미와 함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으며, 밭에서 자기 양식을 마련했던 사람이었다. 그 여러 모습이 겹쳐져 룻이라는 한 사람이 된다.
성경의 족보는 그 긴 삶을 한 줄로 압축한다. 오벳의 어머니 룻. 다윗의 계보에 들어간 사람. 역사에서 보면 짧은 이름 하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보다 훨씬 긴 생활이 있었다. 그 사실은 이름을 남기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하게 한다.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역사바카라에 이름을 남기고, 어떤 사람은 가족의 기억에만 남는다. 어떤 사람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못한다. 그렇다고 기록의 크기가 사람의 삶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룻의 이름이 족보에 남은 것은 특별한 일이지만, 그 이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결국 수많은 평범한 날들이었다. 나오미를 따라 길을 걸었던 일도,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웠던 일도, 새로운 가족 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 시간의 일부였다. 그리고 성경은 그 이후를 더 길게 기록하지 않는다. 오벳이 자라고, 이새가 태어나고, 다윗이 태어나는 시간이 이어진다. 룻 자신의 나머지 삶은 족보 뒤로 물러난다. 그 빈자리를 억지로 채울 필요는 없다. 룻이 그 뒤에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다윗의 이름이 기록되기 훨씬 전에 룻이라는 한 여자가 자기 앞에 놓인 하루를 살아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이름은 때때로 다른 사람의 역사 속에서 다시 발견된다. 부모의 이름 뒤에 자녀의 이름이 이어지고, 스승의 이름 뒤에 제자의 이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이름이 이어진다고 해서 앞선 사람이 다음 사람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룻은 다윗이 되지 않았다. 오벳도 다윗이 아니었다. 각자는 자기 시대를 살았다. 한 사람의 삶이 다음 사람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앞선 사람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이 한 계보 안에서 연결된다는 뜻에 가깝다.
베들레헴에서 룻에게 필요한 것은 왕의 계보에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날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나오미와 함께 살고, 자신이 선택한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었다. 훗날의 이름은 그때의 하루를 대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룻의 마지막을 읽고 나면 ‘어떻게 성공했는가’보다 다른 질문이 남는다. 사람은 낯선 곳에 들어간 뒤 언제부터 그곳에서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가.
누군가의 아내나 며느리라는 이름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주소를 가졌기 때문만도 아니다.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지닌 채 그곳에서 일하고, 관계를 만들고, 자기 몫의 하루를 살아갈 때 그 장소는 조금씩 자신의 삶 안으로 들어온다. 룻의 이름은 족보에 남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룻은 베들레헴의 밭에서 자기 손으로 이삭을 주웠다. 왕의 계 보에 이름이 들어가기 전, 그는 낯선 땅에서 자신의 하루를 살아가던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