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 변신이 이루어진 뒤에도 같은 사랑일까?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인간의 삶 47

by호시우행

피그말리온은 키프로스의 조각가였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그가 세상의 여자들에게 실망하여 결혼하지 않고 지내다가 상아로 한 여인의 형상을 만들었다고 나온다. 그는 자신이 만든 형상을 아름답게 다듬었고, 어느 순간부터 그 조각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졌다. 움직이지 않는 상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에게 옷을 입히고 장신구를 걸어주었다. 꽃을 가져다주고 침대에 눕혀놓기도 했다. 입을 맞추고 말을 걸기도 했다. 상아로 만든 형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피그말리온은 그 침묵을 문제 삼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얼굴과 몸은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조각상은 완성된 형상이었다. 눈은 자신이 정한 곳을 바라보고 입술은 자신이 만든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몸의 자세도 표정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모습을 그대로 눈앞에 두고 볼 수 있었다.


비너스의 축제가 열린 날 피그말리온은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 자신의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갖게 해달라는 소원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조각상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때 차갑고 단단했던 상아가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피그말리온은 다시 만져보았다. 상아는 더 이상 돌처럼 차갑지 않았다. 손끝에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고 몸에는 맥박이 뛰었다. 조각상은 살아 있는 여인이 되었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했고 자녀도 두었다. 오비디우스의 이야기는 그 뒤의 생활을 자세히 적지 않는다. 두 사람이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떤 일로 다투었는지, 서로 다른 생각을 어떻게 맞추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신화는 피그말리온이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이야기를 멈춘다.


그런데 조각상이 살아난 순간부터 피그말리온이 마주해야 할 사람은 이전과 전혀 달라졌다. 상아로 된 조각상은 피그말리온의 뜻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거절할 수도 있고, 피그말리온이 생각하지 못한 말을 할 수도 있다.


조각상일 때에는 피그말리온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곧 그 존재의 모습이었다. 살아난 뒤에는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피그말리온도 알 수 없게 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새롭게 알아가야 한다. 사랑하던 대상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변화일 것이다. 바라보던 대상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관계의 방향이 달라진다.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 바라볼 수 없게 되고, 상대의 눈에 비친 나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말투가 마음에 들고 웃는 모습이 좋아서 가까워질 수도 있다. 상대가 가진 몇 가지 장점이 크게 보이면서 그 사람 전체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까워지면 보이지 않던 모습이 나타난다. 피곤할 때의 말투가 다르고 돈을 쓰는 방식도 다를 수 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시간이 다를 수도 있고,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방법도 다를 수 있다.


처음 좋아했던 몇 가지 모습만으로는 함께 사는 생활을 설명할 수 없다. 부부가 오래 함께 살면서 겪는 어려움도 여기에서 생긴다. 결혼하기 전에는 상대의 좋은 모습을 만나는 시간이 많지만, 함께 살면 좋은 모습과 불편한 모습이 같은 생활 안에 놓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부모는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고, 성실했으면 좋겠고,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녀가 자라 자기 생각을 갖기 시작하면 부모가 그려놓은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부모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가까워질 수도 있다. 부모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자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부모가 마주하는 것은 자신이 기대한 자녀가 아니라 자기 삶을 가진 한 사람이다. 자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삶의 방향까지 정할 수는 없다. 사랑과 결정권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에게는 그 차이가 더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손으로 여인의 모습을 만들었다. 얼굴의 모양도 몸의 모습도 자신이 정했다. 자신이 원하는 아름다움을 상아에 새겼기 때문에 그 형상에는 피그말리온의 취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만들 수 없다. 얼굴을 보고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의 생각까지 조각할 수는 없다. 좋은 말을 듣고 싶다고 해서 상대가 언제나 좋은 말만 해주지는 않는다.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고 해서 상대가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이런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낯선 사람은 나와 다른 선택을 해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 기대가 더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기대가 커지면 상대의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려워질 수 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이렇다고 단정하고, 그 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면 변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계속 달라진다. 어제 중요했던 일이 오늘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일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몸이 달라지고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변화까지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대의 모든 행동을 좋게 본다는 뜻은 아니다. 함께 살아가려면 서로 맞춰야 할 일도 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동도 있다. 다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고치려 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실망하는 순간은 흔하다. 기대했던 말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고, 믿었던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그때 사람은 상대를 다시 바라보거나 자신의 기대를 돌아보게 된다. 피그말리온에게는 그 과정이 처음부터 없었다. 조각상은 실망을 줄 수 없었다. 다른 생각을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피그말리온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원했던 변화가 일어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조각상이 살아났다는 것은 단순히 차가운 상아가 따뜻한 몸으로 바뀌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피그말리온이 더 이상 혼자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 쪽에서 오는 말이 있다. 내가 말을 걸면 대답할 수 있고, 내가 손을 내밀면 잡을 수도 있지만 놓을 수도 있다. 내가 정한 길을 따라갈 수도 있고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관계에는 언제나 상대의 몫이 생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속 모습으로만 간직하려 하면 실제 사람과 점점 멀어질 수 있다. 기억 속의 친구와 지금 만나는 친구가 다를 수 있고, 어린 시절의 자녀와 성인이 된 자녀가 다를 수 있다. 오래전의 배우자와 지금의 배우자가 달라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예전의 사람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과거의 모습 위에 새로운 경험을 더하면서 살아간다. 같은 이름을 가지고 같은 관계 안에 있어도 생각과 몸과 생활은 계속 달라진다. 가까운 사람을 오래 사랑하려면 그 변화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그 뒤의 생활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난 여인과 어떤 관계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신화가 말하지 않은 일을 우리가 만들어낼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변화는 분명하다. 피그말리온이 사랑했던 것은 처음에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형상이었다. 신의 힘으로 그 형상이 살아난 뒤에는 더 이상 피그말리온 혼자 그 존재의 모습을 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여인이 무엇을 좋아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물어야 했을 것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면 들어야 했을 것이다. 피그말리온이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지 판단해야 했을 것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일과 한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은 같은 방식으로 할 수 없다.


이 차이는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 중요해진다. 가까운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할수록 그 사람을 이미 알고 있다고 단정하기 쉽다. 하지만 오래 함께 살았다는 사실이 상대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의 사람은 어제의 사람과 조금 다를 수 있다.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사랑은 과거의 모습을 붙잡는 일이 된다. 상대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묻지 않고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요구하게 된다.


사랑은 상대를 완성된 모습으로 보관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은 조각품처럼 한 번 만들어진 뒤 그대로 남아 있지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 새로운 일을 만나고 선택을 하면서 계속 자기 모습을 바꾼다.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사랑할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과 눈앞의 모습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자신이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각상이 사람이 된 순간부터 그 차이가 생길 가능성이 열렸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살아난 사람이 다시 하나의 조각상이 될 수도 있다. 말은 하지만 내 뜻과 다른 말을 할 수 없고, 곁에 있지만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만 있어야 한다면 몸만 살아 있을 뿐 관계는 다시 굳어버린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 기대와 다른 모습을 가질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과도 닿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상대가 좋아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 차이를 없애는 것이 관계의 목표일 필요는 없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채 같은 식탁에 앉을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선택을 존중하면서 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모든 차이를 해결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차가운 상아는 따뜻한 몸이 되었고, 혼자 사랑하던 형상은 실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소원이 이루어진 순간 사랑의 어려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피그말리온에게는 자신이 만들 수 없는 존재가 생겼다. 그는 그 사람의 얼굴을 조각할 수 없고 마음의 방향도 정할 수 없다. 함께 살아가려면 자신이 만든 아름다움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알아가야 한다.


신화는 두 사람이 결혼하고 자녀를 두었다는 데서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 뒤의 하루를 우리가 알 수는 없다. 다만 조각상이 사람이 된 뒤에는 피그말리온이 더 이상 혼자 작품을 바라보던 방식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하던 것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랑할 대상이 더 완벽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정할 수 없는 부분이 생긴다는 뜻에 가깝다. 상대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하고, 내가 모르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사랑은 감탄에서 생활로 옮겨간다.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서로 다른 의견을 듣는 시간이 길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 순간도 생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내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이 살아난 뒤 어떤 말을 처음 했는지는 오비디우스가 기록하지 않았다.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피그말리온이 만든 모습과 얼마나 달랐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상아였던 존재가 사람이 된 순간, 피그말리온 앞에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들 수 없는 한 사람이 놓였다.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하려면 이제 손으로 다듬을 수 없고, 눈으로만 바라볼 수도 없다. 물어보고 듣고 기다리면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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