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령심사와 AI

by킹오황

AI 수준이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다. 업그레이드 주기도 짧아지고 있고, 에이전트니 브라우저니 온갖 기능들이 추가되고 있어서 이제는 AI를 100% 활용하는 것 자체가 벅찰 정도다.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유학 준비를 하면서 공공행정에 AI가 도입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머릿속으로 종종 시뮬레이션을 그려보곤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정부는 민간에 어떤 사업을 지원할 때 사업자를 선정하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받는다. 이게 짧아도 수십, 수백 페이지이고, 큰 사업이면 수천 페이지에 이르기도 한다고 한다. 분량도 많고 내용도 어려워 담당 공무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세세하게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연구원 같은 곳에 외주를 줘서 사업성을 분석하기도 한다.


이런 걸 AI가 읽고 답을 준다면 어떨까. 행정 효율성은 당연히 올라갈 것이고, 적어도 방대한 자료를 일정한 기준으로 읽고 비교하는 데에는 사람보다 더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업성 분석도 지금보다 객관적이고 정교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AI 딸깍 한 번으로 정부 지원사업에서 떨어진 국민들이 그 결과를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래서 AI가 사업 평가나 사업자 선정에 관여한다면 그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근거도 필요하고, 국민들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용성을 높이는 절차도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용을 연구해 보겠다는 과제를 제출했고, 결국 그것을 계기로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이런 상상에 아주 큰 확신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때 정부가 AI를 활용한다고 하면 주로 챗봇, CCTV 분석, 이미지 검색 같은 비교적 1차원적인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다. 국민의 권리나 이해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이른바 ‘고영향 인공지능’이라고 부를 만한 의사결정을 하기에는 아직 AI가 미성숙해 보였다.


그런데 요즘 내가 느끼는 AI의 수준은 그때와 꽤 다르다. 얼마 전 바카라 한 권 분량쯤 되는 10만 자 이상의 글을 한 번에 읽고선 그 내용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걸 보면서 깜짝 놀랐다. 이미 일반 사람이 짧은 시간에 하기 어려운 수준의 일을 꽤 잘해내고 있는 것 같다.


AI 행정의 수용성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요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상상을 해본다. AI가 단순히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사람한테서 일을 배우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정의도 다르고 보는 시각도 달라서 AGI 시대가 이미 왔다거나, 곧 온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난 가끔 AGI 시대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나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가능한, 적당한 수준의 신입 공무원 같은 AI 하나가 나에게 주어진다고 해보자. 나는 이 녀석에게 도제식으로 법령심사를 가르쳐보고 싶다. 처음에는 기초적인 것부터 알려준다. 전체 법령안에 오탈자가 있는지, 글자체나 크기, 줄 간격 같은 서식에 오류는 없는지, 법령안 형식은 제대로 맞췄는지 확인하라고 한다. 이런 건 한번 제대로 체크하는 법을 가르쳐놓으면 사람보다 훨씬 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다음에는 법령입안심사기준, 내부 심사기준, 각종 심사 참고자료를 준다. 읽고 숙지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동안 심사가 잘 된 사례들을 가지고 실제로 연습을 시켜본다. 법령안 초안을 하나 던져주고, 고쳐보라고 시킨다. AI가 수정한 결과가 나오면 실제 심사 결과와 비교하면서 피드백을 준다.


이 부분은 왜 놓쳤는지. 이건 잘 찾았는데, 왜 이렇게 고쳐야 하는지. 이런 경우에는 어떤 예외가 있는지. 하나씩 대화를 하면서 알려준다. 다시 새로운 법령안을 주고 심사시킨다. 또 틀리면 다시 알려준다. 일을 시키고, 결과를 보고, 피드백하고, 다시 시킨다. 상사가 신입사원에게 일을 가르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신입은 사람과는 좀 다르다. 24시간 부지런하게 일할 수 있고, 엄청난 양의 자료를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한번 받은 피드백을 장기적으로 기억하고 다음 업무에 활용할 수 있다면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무서운 건 한 사람한테만 배우는 것도 아니라는 거다. 한 명의 법제관이 아니라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경험과 노하우를 이 AI에게 계속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금방 1인분, 아니 몇 인분 이상의 법령심사 능력을 가진 AI가 나타나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내 자리도 조금 위태롭겠지만.


사람이 사람 부리듯 AI를 가르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이런 상상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닐 것 같다. 그리고 이건 법령심사 분야만의 이야기도 아닐 거다. 의사든, 변호사든, 회계사든, 엔지니어든, 공무원이든 사람이 오랜 시간 일을 하면서 경험과 노하우를 쌓는 분야라면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AGI의 변곡점이 단순히 AI가 더 많은 양질의 데이터를 공부하고, 더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게 되는 순간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인간과 같이 일을 하면서 받은 피드백을 계속 축적하고, 그걸 다음 일에 적용하고, 결국 자기 능력으로 만들어갈 수 있게 되는 순간이 더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결국 AI가 얼마나 똑똑하냐보다, 얼마나 잘 배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AI가 사람이 미리 만들어놓은 많은 데이터를 공부하는 학생이었다면, 그때부터는 실제 온라인 게임에서 일을 배우는 신입사원이 되는 거다. 그리고 신입은 중참이 되고, 고참이 되고, 어느 순간 전문가가 된다. 물론 배우는 기간은 사람보다 훨씬 짧을 것이고, 어느 순간엔 사람의 능력을 넘어가겠지만 말이다.


법령심사에 AI를 쓰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린, 나만의 개똥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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