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석에서 갑자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선수가 들어왔나보다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거친 숨을 고르는 선수가 수모를 벗고 있었다. 그런데 흰머리가 보였다.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경기리스트를 들춰보았다. 경기리스트에는 이름과 생년, 소속클럽, 지난 기록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1956년생. 초등 선수들 틈에 69세, 곧 70세가 되는 수영 선수가 있었다!
내가 놀란 이유는 나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종목이 자유형, 배영, 평형도 아닌 접영 200미터 경기였기 때문이다. 수영 선수였던 나도 지금은 접영 200미터를 완주할 수 없다. 매일 일정량이상 연습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청년이라도 쉽게 완주할 수 없는 거리다.
전광판에 다음 조의 선수 명단이 뜨고, 출발대 뒤로 선수들이 경기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경기장 맨 왼쪽 라인에서 심판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선수가 내가 있는 쪽으로 오시는 것이 보였다. 희끗히끗한 백발에 배가 꽤 나오셔서 수영복 허리 라인이 뱃살에 덮여 있었다. 다음 조 경기가 치러지는 동안 백발의 수영 선수는 내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거친 숨을 고르셨다. '거기 앉으시면 안 되는데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같은 클럽 선수들과 부모들이 다가와서 백발 선수의 완주를 축하해 주었다.
가끔 80년대생이나 90년대 선수를 본 적은 있었는데, 칠순을 앞둔 어르신 선수라니. 무려 우리 엄마 나이와 같다. 나이가 뭐 대수냐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성인 대회도 아니고 손주뻘보다 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 경기를 하겠다는 마음을 과. 연. 쉽게 먹을 수 있을까?? 어떤 이유로 대회에 나올 결심을 하신 걸까??
어렸을 때 수영 선수가 되고 싶으셨을까?
- 그럼 좀 쉬운 50미터 경기만 나가셔도 될 거 같은데.
혹시 전직 국가 대표이셨을까?
- 그러기엔 기록이 너무 느린 것 같기도.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수영을 잘하던 사람들도 대회를 나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성인들을 위한 수영 클럽에 가서 운동은 할지언정 공식 경기에 나가서 초등학생들 틈에서 시합을 굳이?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한국의 체육대회나 일반적인 엘리트 경기 풍경에 익숙한 나로서는 쉽게 잊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노르웨이 수영대회, 즉 일반 공인 대회는 선수를 ‘나이’나 ‘학년’으로 나누지 않는다. 오직 ‘신청 기록(Påmeldingstid)’으로만 조(Heat)를 짠다. 공식 기록이 없거나(No Time), 최근 페이스가 비슷한 선수라면 열 살 아이든, 일흔의 어르신이든 상관없이 같은 레인에 배정된다. 경기가 끝난 뒤 결과는 각자의 나이대별(2013년생, 2014년생, 마스터즈 연령대 등)로 분리되어 공정하게 기록되지만, 물속에서 뛰는 그 순간만큼은 ‘현재 내가 낼 수 있는 속도’가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르웨이 스포츠가 말하는 ‘모두를 위한 스포츠(Idrettsglede for alle)’의 방식이다. 잘하는 소수만을 가려내는 피라미드가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누구나 좋아하는 운동을 평생 즐길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문화. 생각해 보면 칠순 선수가 초등학생들과 한 조에서 뛰는 게 안될 이유가 있나 싶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저 함께 수영 대회를 참여하는 선수로 서로를 대하면 될 일이다.
수영 대회에서는 가끔 장애를 가진 선수들을 보기도 한다. 한쪽 팔이 없어 한 팔과 킥만으로 몸의 균형을 맞추며 전진하는 여자 아이도 있었고, 눈이 보이지 않아 코치가 레인에서 신호를 주면 턴을 하는 선수도 있었다. 기록을 관리하기 위해 참여 코드는 다를지언정 어떤 제약도 없이 모두가 똑같이 전광판에 이름을 올리고, 똑같은 출발 신호에 맞춰 물에 뛰어든다. 배려라는 이름으로라도 선을 긋는 일은 없다. 이것이 노르웨이식 문화, '통합(Inkludering)'의 실천하는 방법이다.
다음 날, 백발의 선수는 다시 출발대 위에 섰다.
“삑—”
날카로운 전자 출발음과 함께 선수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이들은 팽팽한 탄력으로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백발의 선수는 아이들보다 느렸지만, 묵직하고 흔들림 없는 스트로크로 물을 밀어냈다. 옆 레인의 빠른 선수들을 곁눈질하지 않았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팔을 뻗고, 물을 잡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자신만의 레이스를 묵묵히 채워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왜 이 힘든 도전을 계속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아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니었다. 어제의 자신과 다시 만나기 위해 출발대에 선 것이었다. 오늘의 나를 일으키기 위해 출발대에 선 것이었다.
우리는 자주 옆 레인을 바라본다.SNS와 바카라을 보면 좋은 말들이 넘치게 보이는 요즘이다. 나 역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하면 잊을까 싶어 저장하고 또 메모한다. 그러나 좋은 문장을 읽는 것과 그 문장대로 살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남과 비교하지 말자”는 문장을 저장하면서도 계속 다른 사람의 속도를 확인한다. “도전에는 늦은 나이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시작하려면 너무 늦었다는 이유부터 찾는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을 보며 조급해하고, 다른 사람의 속도에 맞추려다 결국 내의 호흡을 잃고 주저 앉는다. 누군가 빠르게 성과를 내면 나도 당장 그만큼 가야 할 것 같아 불안하다. 그래서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도 스스로 뒤처졌다고 생각해 버린다.
수영을 비롯한 운동을 하면 알 것이다. 다른 사람의 호흡으로 내 레이스를 완주할 수 없다. 숨이 차면 내 호흡에 맞게 속도를 조절해야 하고, 힘이 남아 있다면 한 번 더 물을 힘차게 당겨야 한다. 옆 레인보다 느리더라도 내가 선택한 거리를 끝까지 가는 것이 먼저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발의 선수는 좋은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출발대에 올라가 직접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접영 200m를 완주했다. 그 장면은 어떤 동기부여 문장보다 오래 남았다. 깨달음은 생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을 몸으로 한 번 실행했을 때 비로소 내 삶의 일부가 된다. 완벽하게 준비된 뒤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만큼 팔을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도전은 그렇게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긴 레인에서 중요한 것은 남보다 빠른가가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한 번 더 팔을 뻗었는가. 그리고 오늘도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는가이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레인을 헤엄친다.누군가는 빠르게 나아가고, 누군가는 잠시 숨을 고른다. 때로는 물을 먹고, 방향을 놓치고, 생각보다 훨씬 느린 기록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남의 레이스가 아니라 나의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앞으로 가고 있으니까.
칠순을 앞둔 그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