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이야기 (3편)
지난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리콘밸리의 ‘캠퍼스’는 단순히 규모가 큰 사옥이 아닙니다.
기업은 이곳에서 사람들이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만나고, 어디에서 쉬며,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함께 설계합니다.
같은 캠퍼스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구글·애플·메타가 만든 공간의 풍경은 상당히 다릅니다.
그 차이는 건축 양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각 기업이 어떤 사업을 하고, 사람과 기술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하는지를 함께 바라볼 때 캠퍼스의 공간적 특징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구글은 검색, 유튜브, 지도, 안드로이드, 클라우드, 광고, 인공지능 등 서로 다른 기술과 서비스를 운영합니다. 다양한 전문성이 하나의 회사 안에서 공존합니다.
애플은 아이폰을 중심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운영체제와 앱, 서비스와 클라우드를 하나의 사용자 경험으로 통합해 왔습니다.
메타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 등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콘텐츠, 관심사와 정보를 연결해 왔습니다.
이를 공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흥미로운 차이가 나타납니다.
구글은 이동을 통해 연결하고, 애플은 하나로 묶어 통합하며, 메타는 근접성을 통해 연결의 거리를 줄입니다.
세 기업의 캠퍼스는 이러한 차이를 공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처럼 읽을 수 있습니다.
구글의 초기 본사인 구글플렉스는 실리콘밸리 캠퍼스 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들은 구글 캠퍼스를 떠올릴 때 무료 식사와 카페, 자전거, 운동시설, 휴게공간 등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글 캠퍼스의 특징을 단순히 ‘편의시설이 많은 사옥’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의 장소에 머무르기보다 여러 장소를 오가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업무를 하고,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업무 영역을 벗어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팀의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은 구글의 조직과도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검색을 만드는 엔지니어와 유튜브의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 지도를 만드는 개발자와 광고를 설계하는 사람, 클라우드와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문제를 다룹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전문성을 유지하면서도 필요할 때 서로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구글의 베이 뷰(Bay View) 캠퍼스는 이런 공간적 특징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나사 에임스 연구센터 인근에 조성된 이 캠퍼스는 약 30,900평 규모로, 두 개의 오피스 건물과 행사 공간, 단기 체류 직원용 숙소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약 4,000명의 직원을 수용하도록 계획됐으며 비야케 잉겔스 그룹과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에 참여했습니다.
비야케 잉겔스 그룹(BIG, 덴마크) : 실용적 유토피아, 쾌락적 지속가능성 추구. 대표작은 레고하우스(덴마크), 코펜힐(덴마크), VIA57웨스트(뉴욕) 등
헤더윅 스튜디오(영국) : 물질적 질감과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디자인 추구. 대표작은 베슬(뉴욕), 리틀아일랜드(뉴욕), 1000트리스(상하이) 등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캐노피 지붕입니다.
용의 비늘을 연상시키는 태양광 패널이 지붕을 덮고 있고, 그 아래에는 중정과 아트리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빛과 공기, 식물과 사람의 동선이 건물 깊숙이 들어오도록 만든 것입니다.
업무공간은 팀 단위로 나뉘어 있지만, 그 사이를 중정과 경사로, 공용공간이 연결합니다.
구글은 넓은 공간을 무조건 하나로 열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리하면서 연결했습니다.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 팀에게는 자신들의 영역을 주고, 식사와 회의, 휴식과 이동을 위해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과정에서는 다른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을 열어두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을 가지면서도 필요할 때 다른 영역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글의 캠퍼스는 하나의 거대한 사무실보다 여러 개의 작은 장소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에 가깝습니다.
검색과 지도, 유튜브와 광고, 클라우드와 인공지능처럼 서로 다른 사업이 하나의 회사 안에서 공존하듯, 공간도 차이를 없애기보다 그 차이가 만날 수 있는 경로를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구글이 캠퍼스 안에 설계한 것은 단순한 만남의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있는 이동의 틈입니다.
애플 파크는 구글의 분산된 풍경과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의 약 214,200평 부지에 조성된 애플 파크에는 노먼 포스터가 설계한 78,700평 규모의 ‘더 링(The Ring)’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원형 본관이 있습니다.
노먼포스터(영국) : 첨단 공학기술과 강철, 유리 등 재료를 활용해 미래지향적이면서 구조적 완성도가 높은 건축을 지향하는 하이테크 건축의 대가. 대표작은 HSBC 본사(홍콩), 거킨빌딩(런던) 등
애플 파크를 이해하는 데에는 애플의 제품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아이폰은 전화기, 음악 재생기, 인터넷 통신기기 등 이전에는 서로 다른 기기로 존재했던 기능을 하나의 기기에 통합했습니다.
이후 애플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운영체제와 앱스토어, 기기와 클라우드 서비스를 하나의 사용자 경험으로 연결해 왔습니다.
애플의 생태계는 각각의 기능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방식보다는, 서로 다른 요소가 하나의 경험을 완성하도록 설계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앱스토어 역시 애플이 정한 심사와 보안, 개인정보 보호 기준을 거쳐 앱을 이용자에게 전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공간에 겹쳐 보면 애플 파크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거대한 원형 건물 안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마케팅과 서비스 등 서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분리된 여러 건물에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구글이 여러 ‘동네’를 만들고 그 사이를 연결한다면, 애플은 하나의 구조 안에 서로 다른 기능을 통합합니다.
그래서 애플 파크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적 특징은 원형이라는 형태 그 자체보다 하나의 연속된 구조에 있습니다.
원형 건물의 중심에는 넓은 정원이 놓여 있습니다.
사무실이 건축의 중심을 차지하는 대신 자연과 빈 공간이 중심을 차지합니다.
유리 파사드를 통해 풍경은 업무공간 안으로 들어오고, 건물 안의 사람들은 같은 정원과 계절의 변화를 공유합니다.
서로 다른 업무가 하나의 제품 경험으로 통합되듯,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건축과 풍경 안에서 움직입니다.
여기에서 ‘더 링’은 흥미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고리는 연결의 상징인 동시에 경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원 안의 공간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형성합니다.
이 점은 애플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서비스의 접점을 일관된 경험으로 관리해 온 방식과도 닮아 있습니다.
애플 파크의 언덕 위에 자리한 스티브 잡스 시어터도 이러한 공간적 태도를 보여줍니다.
관람객은 지상의 원형 유리 파빌리온을 통해 들어가지만, 실제 1,000석 규모의 강당은 지하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지상에는 유리와 탄소섬유 지붕이 만든 단순한 형태만 남습니다.
건축이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기보다 진입과 이동의 과정을 통제하고, 마지막에 제품과 발표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구조입니다.
메타의 MPK 20은 또 다른 방식으로 연결을 공간에 구현합니다.
2015년 당시 페이스북의 멘로파크 본사 확장 프로젝트로 완공된 이 건물은 프랭크 게리가 이끄는 Gehry Partners가 설계했습니다.
프랭크 게리(미국) : 비정형적이고 유기적인 곡선을 활용해 조각같은 건축을 추구하는 해체주의 건축의 선구자. 대표작은 구겐하임 미술관(빌바오), 댄싱 하우스(프라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LA) 등
약 12,200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수천 명의 직원이 하나의 거대한 개방형 공간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MPK 20의 핵심은 거대한 하나의 업무 평면입니다.
부서별로 작은 방과 복도를 길게 나누기보다, 하나의 큰 공간 안에 팀별 업무공간과 회의실, 카페, 식사와 휴식을 위한 공간을 배치했습니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짧습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위해 긴 복도를 지나거나 다른 건물로 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개를 들면 다른 팀의 사람들이 보이고, 자리를 조금만 이동하면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공간은 메타의 사업과도 흥미롭게 겹쳐집니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왓츠앱, 메신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콘텐츠, 관심사와 정보를 연결합니다.
한 사람의 게시물이나 메시지는 빠르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다시 댓글과 반응으로 이어집니다.
메타의 플랫폼에서는 정보와 반응의 거리가 짧습니다.
구글이 서로 다른 공간을 이동하며 사람을 만나게 한다면, 메타는 애초에 사람들이 같은 장면 안에 머물도록 합니다. 연결을 위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연결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입니다.
건축 언어도 애플과 다릅니다.
MPK 20은 기념비적인 본사라기보다 거대한 작업장에 가깝습니다.
노출된 구조와 비교적 거친 재료감, 넓게 열린 업무공간은 완성된 제품을 전시하는 공간보다는 무언가를 계속 만들고 고치며 반응을 주고받는 공간에 가깝습니다.
건물의 지붕에는 수백 그루의 나무와 산바카라로가 있는 녹색 공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수천 명이 하나의 거대한 업무공간에 모여 있지만, 그 위에는 또 하나의 야외 생활공간이 놓여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연결의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사람을 가깝게 배치하면 협업과 정보 공유가 빨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늘 보이고, 늘 마주치며, 빠른 반응이 기대되는 환경은 개인에게 피로를 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MPK 20을 단순히 ‘협업을 위한 공간’이라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이곳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서 서로의 존재와 업무를 빠르게 감지하도록 만든 물리적 플랫폼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캠퍼스를 한국에서도 만들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도 사옥을 단순한 업무시설이 아니라 일하고, 배우고, 쉬고, 관계를 만드는 공간으로 바꾸려는 기업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 공간은 실리콘밸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기는 어렵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캠퍼스가 넓은 부지 위에 하나의 작은 도시를 만드는 방식이라면, 한국의 기업들은 높은 도시 밀도와 제한된 토지, 복합개발과 대중교통 중심의 생활권 속에서 공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울에서는 기업의 공간이 도시와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캠퍼스가 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도시의 길과 상업시설, 대중교통과 주거지, 주변의 공공공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한국형 캠퍼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넓은 땅 위에 기업만의 작은 도시를 만드는 대신, 도시 속에서 기업과 도시의 경계를 어떻게 다시 그을 수 있을까요?
다음 편에서는 한국에서 캠퍼스 문화를 지향하는 기업 공간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들은 어떤 사업과 조직문화를 공간에 담고 있는지, 실리콘밸리의 구글·애플·메타와 무엇이 같고 다른지, 그리고 한국의 도시 안에서 기업 캠퍼스가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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