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욕심이란 참으로 간사하고 끝이 없다.
영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내 바람은 소박했다. "Hello" 한마디를 제대로 못 해 진땀을 흘리던 아이를 보며, 그저 남들과 기본적인 대화나 주눅 들지 않고 나눌 수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문이 트이니 슬그머니 학교 성적이 눈에 들어왔고, 영국 최고 명문 사립이라는 KEHS의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고 나자 또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기왕 어렵게 들어간 거, 여기서도 뒤처지지 않고 센터에 서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어쩔 수 없는 한국 엄마라서 그런 걸까' 자문해 보았지만, 사실 나는 원체 승부욕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치열한 서열이 지배하던 무용의 세계에서 자라며, 오직 1등만이 온전히 조명받는 냉혹한 무대를 늘 지켜보았다. 늘 그 꼭대기에 서지는 못했을지언정, 내 가슴속에는 언제나 무대 가장 한가운데인 '센터'를 향한 갈증이 들끓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그 뜨거운 욕망을 밖으로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는 법을 일찍 배웠다는 점이다. 나보다 잘하는 이의 실력은 담담하게 인정하되, 인정하기 힘든 상대 앞에서는 혼자 속으로 유치한 질투를 삭이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곤 했다. 성인이 되어 사업을 하면서도 내 안의 그 승부욕 DNA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 들어오며 내 삶의 태도에는 적잖은 균열이 생겼다.
남들과 아등바등 비교하지 않아도, 남보다 앞서가려고 핏대를 세우지 않아도 일상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비교를 내려놓고 나니 비로소 삶의 평온함이 찾아왔다. 그래서 영국에서만큼은 내 안의 조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유유자적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뜻밖의 합격 통지서 한 장이 그 얕은 평정을 단숨에 흔들어놓은 것이다.
브레이크를 밟으며 건넨 제안
영국에 온 지 고작 2년, 현지 아이들도 몇 년씩 튜터를 붙여 사활을 건다는 학교에 합격한 딸아이를 보며, 잠자던 내 안의 승부욕이 다시금 꿈틀거렸다.
아이에게 감춰진 잠재력을 확인한 이상, 마냥 태평한 베짱이 엄마로만 머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하지만 무용을 하고 사업을 하며 뼈저리게 배운 원칙이 하나 있었다. 욕심이 앞선다고 해서 무작정 앞으로만 내달리는 것은 가장 질이 낮은 하바카라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차분한 검증과 호흡 조절을 거치지 않으면, 아이도 부모도 결국 페이스를 잃고 흔들리게 된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11+ 시험이 끝나는 즉시 영어와 수학 튜터(과외)를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딸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지안아, 너는 영국에 온 지 이제 2년 하고 절반이 좀 넘었어, 너의 실력도 있었겠지만 운도 따라줘서 이 멋진 학교에 합격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여긴 정말 영국 전역에서 공부 잘한다는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야. 엄마는 네가 1등을 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다만 네가 새 교실에 들어갔을 때 수업을 따라가느라 너무 힘들거나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건넸다.
"과외 횟수는 대폭 줄여서 기초만 다지자. 어때?"
아이는 엄마의 설명을 가만히 듣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과외 시간을 크게 덜어낸 대신, 매일 영어 바카라을 읽고 짧은 감상을 쓰며, 어린이 시사 잡지를 소리 내어 읽는 기본적인 생활 루틴만큼은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96명 중 유일한 한국인
Year 7 정식 입학을 앞두고, 신입생들의 진학을 축하하는 인덕션 데이(Induction Day)가 열렸다.
몸에 꼭 맞춰 제작된 정갈한 새 교복을 갖춰 입고 참석하는 날이었다. 빳빳한 옷깃의 짙은 감색 블레이저를 단정하게 입고 서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데,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랐나 싶어 가슴 한구석이 뭉클했다.
교장 선생님의 환영사와 학년 주임 교사의 따뜻한 안내가 이어진 뒤,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되었다. 이번에 입학하는 96명의 신입생 이름을 한 명씩 단상 위에서 호명하면, 아이가 차례로 올라가 전교생과 학부모들의 박수를 받는 순서였다.
그리고 그 96명의 이름이 모두 불렸을 때, 알게 되었다.
단상 위에 오른 96명의 아이들 중, 한국인은 내 딸아이가 유일했다.
수많은 백인과 인도계, 다국적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조금은 쑥스러운 듯 배시시 웃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식이 잘되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던 옛 어른들의 투박한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좋은 학교나 명문이라는 간판이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대변해 주지 않으며, 인생의 완벽한 행복을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무용의 세계에서 냉혹한 순위를 겪어보았고, 슬롯에서 사업을 하며 세상의 거친 파도를 몸소 맞아보았기에 그것이 허상일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가 스스로 노력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좋은 학교가 지닌 단단하고 밀도 높은 환경은 그 삶이 결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든든한 안전망이 되어준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단상에서 내려와 내 손을 꼭 쥐는 딸아이의 손은 따뜻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더 이상 내 조바심이나 채워지지 않은 오래된 욕심으로 아이를 흔들지 않겠다고. 아이가 마음껏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 자신의 힘을 묵묵히 믿어주는 단단한 버팀목으로 남아주겠다고.
교문을 나서자 서늘하면서도 맑은 영국의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엄마의 서툰 울타리를 훌쩍 벗어난 아이의 눈앞에, 영국 세컨더리 스쿨이라는 더 넓고 깊은 세상이 조용히 펼쳐지고 있었다.
[알아두면 좋은 영국 교육 이야기] 세컨더리(중등) 진학과 인덕션 데이(Induction Day)
1. 초등(Prep)에서 중등(Senior)으로의 도약
영국의 중등학교(Secondary School)는 Year 7(만 11세)부터 시작됩니다. 초등학교와 달리 교실을 이동하며 매 교시 다른 전문 교과 교사를 만나게 되며, 학업의 깊이와 과제량이 크게 늘어나는 본격적인 학문 탐구의 시기입니다.
2. 인덕션 데이(Induction Day)의 역할
정식 학기 시작 전(보통 6~7월 또는 개학 직전 9월 초)에 신입생들을 학교로 초대해 학교 적응을 돕는 공식 오리엔테이션입니다.
* 환경 친화: 새 교복을 입고 등교해 학교 시설을 둘러보고, 락커 배정과 시간표 확인, 급식실 이용법 등을 익히며 첫 등교의 두려움을 줄입니다.
* 관계 형성: 담임교사(Form Tutor)와 첫인사를 나누고, 같은 반(Form) 친구들과 팀 빌딩 게임을 하며 새로운 공동체에 소속되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3. 소수자로서의 적응과 다양성(Diversity)
KEHS를 비롯한 대도시 명문 사립학교는 학업 역량 중심(Merit-based)으로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에 영국계 백인뿐 아니라 인도계, 동아시아계 등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섞여 있습니다.
* 특정 인종 그룹에 쏠리지 않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문화적 유연성을 배우며, 학교 역시 배경과 상관없이 학생 개개인의 고유한 잠재력과 성실함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