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글이 아름답다는 열한 살

by양래교

학교생활이 시작되고 가장 뜻밖이었던 점은, 웨스트 미들랜드(West Midlands) 지역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교실임에도 특유의 날 선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방과 후나 주말이면 각자의 취미를 즐기거나 운동장에서 뒹굴기에 바빴다. 한국처럼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학원 버스를 타거나 주말 내내 과외에 매달리는 아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방과 후 튜터를 받는 아이는 교실에서 우리 딸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 입에서 불만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엄마, 친구들은 방과 후에 아무도 튜터 안 해. 나만 왜 수학이랑 영어를 따로 해야 해?"


나는 아이를 식탁에 앉혀두고 차분히 설명했다.


"너는 영국에 온 지 이제 3년 남짓 됐잖아. 친구들은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썼지만, 너는 그 빈틈을 메우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수업 시간에 스스로 체감하는 바가 있었는지 아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제법 야무진 표정으로 협상안을 내밀었다.


"그럼 주 1회씩만 할게. 대신 이번 학기 성적이 괜찮게 나오면 과외를 줄이거나 그만두는 것도 생각해 줘."


그렇게 우리는 영어와 수학을 각각 주 1회로 줄이는 선에서 조용히 타협점을 찾았다.








고전 영어와 작은 디딤돌


학기가 시작된 지 두 달쯤 지났을 무렵, 학교의 세심한 시스템을 실감하는 일이 있었다.


EAL(English as an Additional Language, 비모국어 학생 지원) 담당 교사가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학생들을 따로 불러 개별 면담을 진행한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곧 정규 수업 시간에 고전 문학(Classical English)을 배우게 될 거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친구들에게는 옛날 표현들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단다. 그래서 담당 영어 선생님께 미리 부탁해서, 수업 시간마다 고전 표현을 현대 영어로 함께 정리한 보충 프린트를 챙겨주시도록 조치해 둘게."


아이가 뒤처진다고 나무라거나 알아서 따라오라고 내버려 두는 대신, 문턱 앞에서 미리 작은 디딤돌을 놓아주는 방식이었다. 약점을 지적하기보다 아이가 수업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조용히 받쳐주는 그 배려가 못내 고마웠다.


그리고 그 작은 디딤돌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아이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어느 날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신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엄마, 셰익스피어 글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 그 옛날에 어떻게 이런 문장을 썼을까? 엄마 이것 봐봐, 오늘 배운 내용인데…… 진짜 아름답지 않아?"


아이의 입에서 '셰익스피어'와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나란히 얹혀 나오는 순간,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교재에 적힌 고전 영문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는 내 눈에는 그저 낯설고 어려운 옛 활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교재의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제 느낌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열두 살 아이의 얼굴은 더없이 맑았다.


불과 3년 전, 교실 구석에서 "Hello" 한마디를 겨우 뱉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영국의 대문호가 남긴 문장을 읽으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 연신 감탄하자, 아이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덧붙였다.


"엄마,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영어 선생님이 수업을 정말 재미있게 가르쳐주셔. 다 선생님 덕분이야."


제 실력을 뽐내기보다 가르쳐준 선생님의 수업을 먼저 떠올리는 아이의 무던함이 마음에 와닿았다.











뒤바뀐 성적표, 그리고 용의 몸통


12월 겨울방학을 앞두고 입학 후 첫 중간 성적표(Progress Report)가 도착했다.


해외에 사는 한국 부모들 사이에서는 흔히 떠도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국 아이들은 수리 감각이 좋아 수학은 잘 나오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영어는 바닥을 기기 마련"이라는 통설이었다. 딸아이가 평소 영어 수업을 즐거워하고 수학을 조금 버거워하긴 했지만, 나 역시 은연중에 '그래도 한국 아이니 수학 평가가 더 낫겠지' 하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메일을 열어본 순간,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영국 사립학교의 중간 평가는 학습 태도(Attitude to Learning)와 과제 수행도(Standard of Class Work & Homework)를 4단계(Excellent - Good - Satisfactory - Improvement needed)로 나누어 평가하는데, 아이의 결과는 이러했다.


영어 (English): 학습 태도 [Excellent] / 수업 및 숙제 수행도 [Good]

수학 (Mathematics): 학습 태도 [Good] / 수업 및 숙제 수행도 [Satisfactory]


영어가 수학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아온 것이었다.


웨스트 미들랜드에서 내로라하는 아이들이 모인 교실에서, 이제 겨우 3년 차에 접어든 아이가 영어 과목에서 최고 등급과 우수 등급을 나란히 받아 들었다.


용의 머리는 감히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아이는 불안 속에서 지레 걱정했던 것처럼 바닥을 깔아주는 '용의 꼬리'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는 거친 물살 속에서도 제 호흡을 유지하며, 단단하게 용의 몸통 어딘가에 제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한 힘이 있었다. 영어가 서툴러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했던 시간들 속에서, 아이는 남들보다 느릴지언정 정직하게 문장을 삼키고 제 것으로 소화해 내고 있었다.


욕심을 부려 아이를 앞서 끌고 갈 필요도, 불안에 쫓겨 채근할 이유도 없었다. 그저 낯선 세상 속에서 제 보폭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아이의 뒤에서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주면 충분했다.


창밖으로 차가운 영국의 겨울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조용한 다짐 하나를 얹어두었다. 아이가 이 넓은 세상 속에서 제 배움을 온전히 마칠 수 있도록, 이 길의 끝까지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겠노라고.










[알아두면 좋은 영국 교육 이야기] 영국의 EAL 지원과 문학 수업




1. 세심한 사다리: EAL(English as an Additional Language) 시스템


영국 학교는 비영어권 학생들을 위한 별도의 언어 지원 체계인 EAL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 배려와 지원: 학생을 열등생으로 분리하지 않고, 정규 수업에 원활히 참여할 수 있도록 어휘 리스트, 고전 문학의 현대어 번역본, 1:1 리딩 세션 등을 맞춤형으로 제공합니다.


* 정서적 안정: 학습 내용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사전에 디딤돌을 놓아줌으로써, 다문화 배경의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돕습니다.





2. 텍스트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영문학(English Literature) 수업


한국의 국어 교육이 시험 지문 분석과 문법 테크닉에 치우치기 쉬운 반면, 영국의 영어 수업(English Literature)은 텍스트 자체를 감상하고 토론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 조기 고전 읽기: Year 7(중등 1학년)부터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빅토리아 시대 고전 소설을 원문으로 접하며, 시대적 배경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합니다.


* 감상과 비평: 정답을 맞히는 객관식 문제 대신, "이 대목에서 작가가 왜 이런 은유를 썼는가?", "주인공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에세이로 풀어내는 훈련을 반복합니다.





3. 과정과 태도를 중시하는 프로그레스 리포트(Progress Report)


영국 중등학교의 중간 성적표는 단순한 시험 점수나 전교 석차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 평가 항목: 학생이 수업에 임하는 태도(Attitude to Learning), 과제 완성도(Standard of Work), 자기 주도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합니다.


* 성장 중심: 현재의 절대적인 점수보다 아이가 지난 학기에 비해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하고 발전하고 있는지를 부모와 학생에게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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