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내내 놀다 치른 영국사립학교 입학 테스트

by양래교

영국 전 지역에서 손꼽히는 명문 사립학교인 KEHS(King Edward VI High School for Girls)에 지원서를 내놓고도, 우리 집의 여름은 이상하리만치 무던하게 흘러갔다.


당시 11+ 시험을 준비하던 현지 학부모들은 방학 여행마저 미뤄둔 채 튜터 수업과 문제집에 매달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입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시험을 불과 석 달 앞두고 한 달 동안 캐나다로 장기 여행을 떠났다.


"경험보다 값진 공부는 없으니까, 시험 몇 점 올리겠다고 방학 여행을 포기하지는 말자. 대신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돼."


아이에게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건넸지만, 사실 여기에는 솔직한 속내가 있었다. KEHS에 합격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에 부릴 수 있었던 여유였다. 만약 아이에게 합격할 가망이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나 역시 여행 일정을 접고 다른 부모들처럼 아이를 바카라상 앞에 앉혀두었을지 모른다. 어차피 우리에게는 너무 높은 문턱이었기에 큰 고민 없이 짐을 쌀 수 있었다.









캐나다의 야생, 그리고 런던의 먹통 와이파이


여행 중에도 나름의 양심은 있어서 간간이 온라인 줌(Zoom) 수업을 잡아두긴 했다. 하지만 몇 달 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 앞에서 노트북 화면 속 문제집에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캐나다에 머무는 동안 일주일은 보호자도, 휴대전화도 없이 자연 속에서 지내는 야외 캠프에 아이를 보냈다. 시험에 대한 부담감 없이 숲을 뛰어다니며 흙먼지를 묻히고 놀았으니, 아이로서는 그야말로 즐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에서 보낸 일주일마저 숙소의 와이파이가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수업을 전혀 진행하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마음껏 놀았으니까, 집에 가면 약속한 대로 공부 열심히 하는 거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다짐을 받았다. 아이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어쩌면 나 혼자 앞서가며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40일의 집중


집으로 돌아오니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40일 남짓이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나름의 집중 기간을 가졌다. 꼭 합격하겠다는 욕심이라기보다는, 영국 최고의 학교 시험을 치른다는 계기를 빌려 그동안 해온 공부를 밀도 있게 정리해 보고 싶었던 내 계산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약속을 잘 지켜주었다. 늘어난 일정에도 별다른 불평 없이 묵묵히 따랐다.


영어는 주 3회(각 1시간 30분), 수학은 주 2회(각 1시간 30분)로 튜터 시간을 늘렸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동안 꾸준히 해오던 매일의 문제집 풀이와 독서, 독후감, 소리 내서 읽기 등 루틴을 차분히 이어갔다.


당시 아이의 영어를 봐주던 튜터는 런던 UCL 영문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딸아이가 지원한 KEHS를 졸업한 선배였다. 그녀는 아이가 쓴 글을 가만히 읽어보더니 내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KEHS는 지금 당장 완벽한 글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는지 '잠재력(Potential)'을 봐요. 이 아이의 글에는 그 가능성이 분명히 보여요."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마음에 깊이 새겨듣지 않았다. 상대에게 면전에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영국인 특유의 기분 좋은 칭찬이나 돌려 말하기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침의 무심함, 오후의 잔디밭


마침내 시험 날 아침이 밝았다.


교문 앞은 시험을 치르러 들어가는 아이들과 배웅하는 몇몇 부모들이 섞여 있었지만, 아침에는 이 시험의 진짜 규모를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딸아이의 작은 등 뒤를 보며 나직하게 한마디를 건넸을 뿐이었다.


"잘하려고 애쓰지 마. 그냥 아는 만큼 편하게 풀고 나와."


불과 3년 전, 영어 한마디 못 알아들어 교실 구석에서 입을 꾹 닫고 있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제 발로 시험장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부모로서 이미 마음속 백 점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입시의 진짜 실체를 마주한 것은 시험이 끝나고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였다.


교문이 열리고 시험을 마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끝없이 펼쳐진 학교 잔디밭이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메워져 있었다. 한꺼번에 모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만 얼핏 보아도 500명에서 600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한 해 선발 인원은 고작 96명 남짓. 그제야 버밍엄과 웨스트 미들랜드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전부 모였다는 명문 사립학교 입시의 무게감이 서늘하게 와닿았다. 아침에 아무것도 모른 채 태연하게 아이를 들여보냈던 내 무지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새끼 까치와 종이 한 장


그 많은 인파를 뚫고 걸어 나오는 아이의 표정은 다행히 밝았다. 수학도 시간 안에 다 풀었고, 논술 시험도 칸을 빈틈없이 채웠다고 했다. 창작 글쓰기(Creative Writing)의 주제를 묻자 아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동물을 돌보거나 사랑했던 마음에 대해 쓰는 거였어."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썼어?"


"얼마 전에 할머니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나무에서 떨어진 새끼 까치 기억나? 눈도 못 뜨고 떨고 있어서 상자에 담아 먹이도 주고 돌봤는데, 결국 하늘나라로 갔잖아. 그때 내가 느꼈던 슬픔이랑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썼어."


아이는 시험을 위해 지어낸 거창한 이야기 대신, 상자 안에서 보살피다 결국 떠나보냈던 작은 생명의 기억을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것이었다.


학원에서 공식을 외우듯 익힌 기교보다, 삶에서 직접 겪은 온기 어린 기억을 적었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참 잘했다. 네 마음을 솔직하게 담았으면 그걸로 충분해."


인상 깊었던 것은 시험장 안의 분위기였다.


팽팽한 긴장감만 가득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내 생각과 달리, 아이의 입에서는 뜻밖의 다정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 낯선 환경에 얼어붙어 있던 어린 응시생들을 위해 언니들이 교실로 찾아와 긴장을 풀어주는 퀴즈와 가벼운 게임을 함께 해주었다고 했다. 시험 사이 쉬는 시간에도 언니들이 대기실에 머물며 아이들의 말벗이 되어주었다.


점수와 당락을 가리는 자리에서도 아직 어린 열 살짜리 아이들의 불안을 먼저 헤아려주는 배려.


결과만으로 아이를 평가하기보다, 아이들의 긴장을 덜어주려던 학교의 태도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학교가 가진 여유와 섬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결과를 점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자유롭게 보낸 방학, 집으로 돌아와 40일 동안 묵묵히 땀 흘려본 시간, 그리고 시험지 위에 제 삶의 진솔한 한 조각을 펼쳐놓고 나온 것만으로도 그 여름과 가을을 지나온 과정은 충분히 값진 것이었다.











[알아두면 좋은 영국 교육 이야기] 영국 11+ 사립학교 시험과 창작 글쓰기(Creative Writing)




1. 사립학교 경쟁률과 선발 방식


KEHS를 비롯한 최상위권 사립 데이스쿨(Day School)은 보통 4개 학급(Form), 약 90-100명 안팎을 선발합니다. 통상 500-700명 이상의 지원자가 몰려 약 5~7:1 수준의 경쟁률을 보이며, 1차 필기시험(영어·수학·추론)을 거쳐 2차 인터뷰 대상자를 추려냅니다.




2. 창작 글쓰기(Creative Writing)의 평가 기준


영국 명문 사립의 영어 시험에서 당락을 가르는 핵심은 논술 및 창작 글쓰기입니다.


* 표현의 진정성: 현학적이고 어려운 단어를 억지로 나열하는 것보다, 주제에 맞는 일관된 흐름과 구체적인 감각 묘사(Show, Don't Tell), 그리고 학생 본인의 진솔한 경험과 통찰이 담겨 있는지를 높게 평가합니다.


* 성장 잠재력(Potential) 중심: 시험 당일의 완벽한 문법 테크닉보다는, 아이가 가진 사고의 깊이와 언어적 감수성을 통해 입학 후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핍니다.





3. 시험장 안의 파스토랄 케어(Pastoral Care)


영국 사립학교는 입시 당일에도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Pastoral Care)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6학년 응시생들의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해 식스폼 재학생들이 도우미로 배치되어 대기 시간 동안 가벼운 보드게임이나 대화를 유도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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