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해가 더 안전했다

by는개





약은 자꾸 우울증 진단 이전,

내가 싫어하던 ENFP색의 원래의 나를 불러냈다.


날것의 충동과 감정 기복이 터져 나올 때마다 나 자신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모든 감정이 무디게 가라앉아 있던 우울의 심해 속이 훨씬 안전했다는 사실에 매일 매몰되었다. 최소한 이 파괴적인 칼날에 스스로 찔릴 일은 없었을 텐데.


게다가 새로 바뀐 약물은 이전까지 나를 괴롭혀왔던 과거만을 부른 것만이 아니었다.

그전까지는 나를 위협하지 않던, 기억 속에 묻혀있던 과거까지 소환했다.









<심리학적 평가 보고서> 결과지를 받아 든 이후부터 나는 기존에 있던 우울함과 불안함과는 전혀 다른 너무 많은 억울함은 시차를 상관하지 않고 폭풍우마냥 밀려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치여 무력하게 쓸려갔다.


가장 비참한 것은 허탈감이었다.

슬롯에 적응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버텨내려 쏟아부었던 그 수많은 피 말리는 노력이, 사실 타인들은 단 한 번도 할 필요가 없었던 소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무력감. 나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고 멍청할까 자바카라하며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 의지나 무능의 문제가 아닌, 유전자 결합으로 인한 기질적 결함이었다.

괴상한 성격이 아닌 그저 장애의 일종.


아주 진작에 알았더라면, 수많은 자바카라 대신,

'내가 못하는 게 당연하다'며 자존감을 지킬 수 있었을까....


아무리 가정해 봐도 과거는 바뀌지 않고

여전히 나는 그저 자존감 낮고 '나'라는 존재를 끔찍하게만 생각하는 채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이성적으로 되뇌어도,

평생을 부정적 자바카라 속에서 살아온 마음은 쉽게 방향을 틀어주지 않아서

나를 좋게 보기가 힘들다


더 나아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더 나아져 보겠다고 병원을 옮겼는데 더 힘들어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우울한 차로 그렇게 사는 게 나았는지도 몰라.














마음속에서는 매 분 매 초 분노와 억울함이 들끓는다.

하지만 세상이 요구하는 정상인의 기준은 높고, 이 채로의 나는 다시 과거를 되풀이하며 누구에게든지 거절당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거절당하고 마음 아플, 그럴 체력이 없었다. 세상 밖으로 이 날것의 충동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끝이야.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은 이 거대한 쓰나미를 내면 깊숙이 억누르는 것뿐이었다. 시퍼런 칼날을 쥔 채 속으로 피를 흘릴지언정, 겉으로는 무난하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도록 가면을 고쳐 쓴다. 무너질 것 같은 분노를 누르고, 힘들면 먹으라고 준 상비약을 계속 삼켜가면서 의식적으로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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