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를 찾아서 1

첫 번째 허상

by는개






배우자에게 다른 병원을 알아보겠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몇 주의 시간이 걸렸다.

그 기나긴 침묵과 무기력을 뚫고, 나는 겨우 다른 병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을 나서기 전부터 또 다른 벽이 나를 막아섰다.


병원을 옮기겠다고 선언하고 일 년 넘게 쌓인 처방전과 진료 내역서를 요구했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황당한 건 그다음이었다.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치렀던 심리검사지의 사본을 받으려 하자, 병원에서는 발급 비용을 따로 내야 한다고 말했다. 결과 보고서가 아닌 결과지 원본을 받아야겠다고 한 것인데 나도 받아본 적이 없는 결과지의 재발급비를.


어이가 없었다. 목소리가 커졌다. 내 돈을 내고 내 뇌를 검사한 기록인데, 왜 사본 한 장을 챙기는 데도 발급비를 뜯겨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데스크의 간호조무사들은 기계처럼 발급 비용이 규정이라며 벽을 쳤고, 영문 모를 실랑이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다른 의사를 만나러 이 병원 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 하찮은 종이 몇 장이 가로막은 행정적인 촌극 앞에서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치고,

질릴대로 질려버렸다.










그렇게 온몸의 진을 다 빼가며 간신히 손에 쥔 기록들을 들고, 인터넷으로 수소문해 찾은 세 군데의 병원 중 가장 가까운 첫 번째 곳으로 향했다.


병원은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쳤는지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했다. 데스크의 간호사들은 새로 오픈한 병원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고, 나는 그 번잡한 소음 속에서 한 시간 가까이를 다시 멍하니 기다려야 했다.


겨우 이름이 불려 들어간 진료실, 개인 짐이라고는 없이 바카라상과 의자만 덩그렇게 있는 그 공간에는 낯선 얼굴이 앉아 있었다.


병원 홈페이지 전면에 내걸려 있던, 내가 수소문 끝에 찾아온 그 원장 의사가 아니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보여 과연 내 상태를 알기나 할까 싶던 페이닥터. 그는 내가 지독하게 싸워서 챙겨온 처방전과 보고서를 앞에 두고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환자가 눈을 똑바로 뜨고 앉아 있는 앞에서, 그는 옆에 놓인 의학 바카라을 뒤적거렸다.

무슨 애착 인형을 붙잡듯 바카라장을 덤벙덤벙 넘기며 뭔가를 찾는 모양새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개인병원에서 페이닥터를 막 계약해서 쓴다고 하지만.... 마치 졸업도 하지 않은 의대생을 데려다 놓은 것 같아 실소가 터졌다.


내 삶을 통째로 뒤흔든 그 네 줄의 진단명이,

저 어린 의사의 손에 들린 바카라장 사이에서 가볍게 흩어지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 못해 기운이 빠졌다.


형식적인 면담이 끝나고 수납처에서 받아 든 진료 세부영수증의 기록은 나를 더 기운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진료실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설명 한마디 듣지 못했는데,

진료비에, 무슨 검사비에, 또 무슨 검사비가 덕지덕지 붙어 터무니없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가장 기력이 빠지는 건 약국에서 받아 든 하얀 봉투였다. 새로 처방되었다는 알약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전 병원에서 나를 그토록 무기력하게 만들었던, 내 몸을 마루타 삼아 실험하며 부작용에 진저리를 쳤던 그 약들이 중복되어 있었다. 아니면 그 약과 다르지 않은 약들이 고스란히.


전 병원에서 조무사들과 진을 빼며 싸워 들고 나와 도달한 이 오래된 빌딩, 번지르르한 병원 내부에 와서 같게 된 댓가가 고작 이것이었나.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껍데기만 바뀐 병원, 원장이 아닌 대리 의사.

환자 앞에서 바카라을 뒤적이는 미숙한 페이닥터가 처방한, 믿음이 가지 않는 똑같은 약봉지.




견딜 수 없이 힘겨워졌다.


정말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치고 지쳐서,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진심으로 하나도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전 병원과는 이미 다리를 끊어버렸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 가녀린 기력을 남김없이 쥐어짜고 있었다.


나는 가라앉은 내 마음을 겨우 부여 잡고 그 번지르르한 빌딩을 걸어 나왔다.

이 병원에 다녀야 하는 걸까. 한 발자국도 움직일 기운이 없었다.

그리고 멍하기만 했다. 내가 그럼 그렇지............


익숙하게 무거운 약봉지를 들고, 건물을 나오는데 배우자가 물었다.

어땠냐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여기는 다닐 수 없겠네.

왜?

간호사들도 부산스럽고, 원장도 아니었다며. 거기다 환자앞에서 무슨 바카라을 뒤적거려. 됐어, 가지 마.

그래.


아, 그렇구나. 그런가 보구나.

두 번째 병원으로 가야 하나 보았다.








근데

거기라고 진짜 의사가 있을까.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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