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의 세계
[공통의 세계]
아렌트는 '공적(public)'이라는 말이 서로 얽힌 두 현상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첫째는 나타남(appearance)이다. 공적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 들릴 수 있으며, 우리가 타인과 함께 보고 듣는 것이 실재를 구성한다. 혼자 느끼는 기쁨과 고통은 아무리 강렬해도 공적 형태로 옮겨지기 전에는 그림자 같은 존재에 머문다. 둘째는 세계 자체다. 이때의 세계는 지구나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사의 총체이며, 우리 각자가 사적으로 차지한 자리와는 구별되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이 공통의 세계를 아렌트는 탁자에 비유한다. 사람들이 탁자를 둘러싸고 앉을 때 탁자는 그들 사이에 놓여 서로를 이어 주지만, 동시에 서로가 부딪쳐 한데 뭉치지 않게 거리를 만든다. 세계는 모든 '사이'가 그렇듯 사람들을 관계 맺게 하면서 떼어 놓는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복수성이다. 탁자를 둘러싼 사람들은 각자 다른 자리에서 같은 탁자를 본다. 위치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달라도 그것이 같은 탁자임을 서로 확인할 수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실재라고 믿는다. 실재는 홀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말을 통해 보증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의 종말은 파괴가 아니라 단일화다. 세계가 오직 하나의 관점으로만 나타나는 때, 대중슬롯가 사람들을 한데 눌러 붙이는 때, 탁자는 사라진다. 아렌트는 강신술 모임에서 둘러앉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탁자가 사라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까이 앉아 있으나 서로 사이에 아무것도 없다. 이 상태에서는 마주 보는 일도, 맞서는 일도 어렵다.
공통의 세계는 또한 우리의 수명을 넘어서 지속한다. 우리가 나기 전에도 세계는 있었고 우리가 죽은 뒤에도 남는다. 폴리스가 추구했던 공적 영역의 '세속적 불멸'도 이 지속성에 기댔다. 공적 영역이 지속하는 세계 위에 서 있기에, 한 사람의 말과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기억될 가능성을 얻는다. 한 행위가 바카라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지속과 기억 안에서다.
[사적 영역과 소유]
공적 영역이 전부라면 어떨까. 아렌트의 대답은 뜻밖이다. 전적으로 공적인 삶은 피상적이 된다. 드러나는 것이 깊이를 가지려면, 어둠에서 올라와 보이게 되는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유물의 네 벽은 공적 세계의 시선과 소리에서 벗어나 숨을 수 있는 유일하게 믿을 만한 자리다. 아렌트는 이 사적인 것의 신성함을 출생과 죽음처럼 숨겨진 것의 신성함에 견준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자라나고 돌아가는 어둠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통념은 뒤집힌다. 사적 영역은 공적 삶의 반대편에서 그것을 해치는 영역이 아니라, 공적 삶이 깊이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배경이다. 우리가 광장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은 광장 바깥에서 자란 생각과 경험에 의지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사생활(privacy)은 '결여'를 뜻했다. 사적임은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것을 빼앗긴 상태였다. 타인에게 보이고 들리는 데서 오는 실재, 공통의 세계를 매개로 한 관계, 생명보다 오래 지속하는 것을 이룰 가능성에서 박탈된 상태다. 오직 사적으로만 사는 사람은 '완전한 의미에서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사적 영역의 어둠은 필요하지만 그곳에만 머무는 것은 박탈이라는 이중성이 여기 있다.
이와 관련해 아렌트는 소유와 "부(富)"를 구분한다. 고대의 소유는 세계 안에 자기 몫의 자리를 갖는 일이었다. 소유를 잃은 사람은 세계 안에서 설 자리, 곧 시민으로서 발 디딜 곳을 잃었다. 소유의 핵심은 재화의 양이 아니라 세계 안의 자기 자리다.
[슬롯가 바꾼 사적 영역]
근대에는 슬롯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 변화를 사적 영역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면, 근대에 발견된 "내밀성(intimacy)"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슬롯적인 것에 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슬롯가 구성원에게 행태와 순응을 요구하자, 사람들은 마음의 내면에서 슬롯의 요구에 맞설 거처를 찾았다. 사적 영역은 더 이상 '필연을 감당하는 가정'이 아니라, 슬롯의 균질화로부터 내밀한 것을 지키는 피신처가 된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소유의 의미도 달라졌다. 근대는 소유를 세계 안의 자기 자리가 아니라 부의 축적으로 바꾸었다. 아렌트는 근대 초 수탈과 자본의 축적이 사람들에게서 세계 안의 자기 몫을 빼앗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사람들은 세계에 발을 붙이는 대신 끊임없이 늘어나는 부의 과정에 놓인다. 이를 아렌트는 "세계 소외(world alienation)"의 한 형태로 이해한다. 그래서 사적 소유를 옹호하느냐 폐지하느냐의 논쟁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간다. 필요한 것은 부의 증식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 자기 몫을 갖는 것이다. 아렌트에게 소유는 사적 영역이 공적 세계에 연결되어 있다는 증표이며, 둘을 잇는 끈이 끊어지면 사람들은 세계 없는 존재가 된다.
[행위의 장소]
노동은 생명의 필요에 매인 활동이므로 사적 영역에 속하고, 행위는 공적 영역에 속한다. 작업은 만들어 낸 사물이 교환되는 시장과 관련된다. 활동은 장소를 가지며, 장소가 달라지면 활동의 성격도 달라진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폴리스의 법과 성벽의 이미지다. 그리스인은 법을 도시를 둘러싼 성벽에 견주었다. 성벽이 도시의 경계를 긋고 보호하듯, 법은 정치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을 한정하고 지탱한다. 성벽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행위가 가능한 조건을 만든다. 정치 공간이 자연스럽게 생겨나지 않고 건축적으로, 곧 인위적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AI시대와 공통의 세계]
개인화된 피드와 맞춤형 응답은 사람마다 다른 정보 환경을 만든다. 각자가 같은 사안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사안을 보게 되는 것이다. 탁자를 둘러싼 관점의 복수성이 아니라, 사람마다 자기 탁자를 따로 갖는 상태다. 이때 우리는 같은 대상을 두고 말다툼할 기반마저 잃는다. 생성형 이미지와 영상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실재가 타인과 함께 보고 들은 것으로 보증된다면, '보았다'는 사실이 더는 보증이 되지 못하는 때 실재의 근거도 흔들린다. 소수의 모델이 다수의 글쓰기와 사고를 매개할 때 관점이 균질해질 위험도 있다. 아렌트가 경고한 단일화가 다른 경로로 나타나는 셈이다.
행동 추적과 데이터 수집은 숨을 수 있는 자리를 투명하게 만든다. 아렌트가 말한 사적 영역의 어둠, 곧 생각과 감정이 자라나는 숨겨진 자리가 데이터가 추출되는 자리로 바뀐다. 상시 노출되고 기록되는 삶은 전적으로 공적인 삶과 닮아 있고, 아렌트의 말대로라면 깊이를 잃기 쉽다. 소유에서 부로의 전환도 새로운 형태로 되풀이된다. 데이터는 새로운 부가되었지만, 그 데이터를 만들어 낸 개인은 세계 안에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채 추출의 대상이 된다. 플랫폼은 '장소 없는 장소'로서, 누가 들어와 있고 누가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성벽이 행위의 공간을 한정하고 보호한다면, 이 공간에는 경계도 보호도 분명하지 않다.
바카라임은 공통의 세계와 사적 영역이 함께 있을 때 성립한다. 공통의 세계가 없으면 한 행위를 같은 기준에서 평가할 토대가 없다. 같은 사안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마주할 수 없다면 누구도 누구에게 바카라임을 물을 수 없다. 사적 영역이 없으면 바카라임을 질 내면이 자라지 못한다. 성찰과 양심은 드러나기 전에 어둠 속에서 자란다. 탁자는 사라지고 어둠은 걷히는 환경에서는 바카라임을 물을 기반과 바카라임질 주체가 함께 약해진다.
화면 중앙에는 어린 공주가 서 있고, 시녀들과 난쟁이, 개가 그를 둘러싼다. 왼쪽에는 거대한 캔버스 앞에 붓을 든 화가가 서 있다. 벽의 거울에는 왕 부부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치고, 뒤편의 열린 문 너머 계단에는 한 사람이 서서 방 안을 돌아본다.
이 그림은 보고 보이는 관계를 여러 겹으로 겹쳐 놓는다. 인물들은 그림 밖의 누군가, 곧 거울 속 왕 부부이거나 그림을 보는 우리를 향해 시선을 둔다. 화가는 우리를 보면서 동시에 그림을 그린다. 한 방 안에 여러 위치의 시선이 있고, 각자는 다른 자리에서 같은 장면의 일부를 본다. 아렌트의 탁자를 연상시키는, 복수의 관점이 하나의 공통된 장면을 이루는 구조다. 이 방에서 사람들은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같은 장면에 묶여 있다. 동시에 이 그림에는 어둠이 있다. 화면 위쪽의 넓은 공간은 어둑하고, 거울과 열린 문은 방 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어진다. 보이는 것과 숨겨진 것이 한 화면에 함께 있다. 드러남은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어둠은 드러남이 있어야 어둠으로 의미를 갖는다. 아렌트가 말한 사적 영역의 어둠, 곧 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깊이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배경이 이 화면에서는 눈에 보이는 면적으로 존재한다.
화가 앞의 캔버스는 뒷면만 보여서 우리는 무엇이 그려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데이터가 모이는 환경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지 보지 못한 채 보이는 쪽에 놓인다. 다만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의도가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다. 이 그림은 화가가 무엇을 그리는지를 두고 오랫동안 해석이 갈려 왔고, 미셸 푸코도 『말과 사물』 서두에서 이를 표상과 시선의 구조로 읽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 방을 하나의 공통된 장면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각자를 따로 겨냥하는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뒤편의 열린 문처럼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물러설 자리가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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