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이 막힌 것도 아닌데 멈춘 느낌, 그 정체감이 말해주는 것
주식을 보다 보면 한동안 제자리인 종목이 있습니다.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고 좁은 폭에서 계속 요동치기만 하죠. 다른 종목은 쭉쭉 오르는 것 같은데 내 것만 몇 주째, 몇 달째 그 자리입니다. 이쯤 되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지금이라도 팔아야 하나?
비슷한 심정은 우리의 커리어에도 있습니다. 연차는 쌓이는데 실력은 제자리인 것 같고, 남들은 앞서가는 것 같은 느낌이요. 요즘 일은 나아지는 것도 없이 그냥 흘러만 갑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마음이 생기죠.
이직해야 하나?
같은 제자리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서로 다른 뜻이 숨어 있습니다.
커리어의 정체는 생각보다 오래된 연구 주제입니다. 정체를 둘로 나누는 구분은 1980년대에 자리를 잡은 뒤로 40년 가까이 이 분야의 기본 틀이었어요. 연구들을 찾아보면 결론은 하나로 모입니다. 정체를 한 덩어리로 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는 올라갈 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정체, 이른바 구조의 정체입니다. 회사라는 조직의 피라미드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그 위가 이미 꽉 차 있거나 조직이 더 커지지 않는 경우죠. 열심히 해도 다음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좀 다릅니다. 자리와는 상관없이 지금 하는 일에서 배울 걸 거의 다 배워버린 상태예요. 승진을 못 한 것도 아니고 누가 앞을 막은 것도 아닌데, 그 일이 새로 가르쳐 주는 게 없습니다.
둘은 답이 다릅니다. 전자는 역할이나 자리 자체를 바꿔야 풀립니다. 후자는 꼭 회사를 옮기지 않아도 돼요. 우리가 커리어에서 흔히 느끼는 정체감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처음 일을 맡았을 땐 모든 게 새롭습니다. 하나씩 익힐 때마다 눈에 띄게 늘었고 어제는 못하던 걸 오늘 해내는 성취감이 있었는데 반년, 1년, 2년이 지나면 웬만한 건 손에 익습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처리되고 어떤 일은 소위 눈감고도 하게 돼요.
바로 그 지점에서 성장이 둔화됐다고 느낍니다. 일이 쉬워졌으니까요.
그러니까 이 정체는 자신이 못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그 일을 잘하게 된 뒤에야 찾아오는 감각인 거죠. 배울 게 아직 한참 남아 있을 땐 제자리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성장을 멈췄다는 느낌이 든다면 적어도 지금 맡은 일의 대부분은 이미 손에 익었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제자리에 오래 있으면 실력도 같이 녹스는 것 아닐까 싶어집니다. 열정이 식은 채로 버티다 결국 뒤처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우리가 정체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2025년에 국제 학술지 <Applied Psychology>에 실린 커리어 정체 관련 연구를 보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연구진은 앞서 말한 두 정체가 성과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살펴봤습니다. 설문을 두 차례에 걸쳐 실행했고 본인 응답만이 아니라 상사의 평가까지 함께 모았어요.
두 정체는 다른 얘기를 해요.
올라갈 자리가 없어서 생기는 정체는 특히 경력 후반의 사람들에게서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더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고 느끼면 일에 대한 자신감이 줄고, 그 자신감이 낮아진 만큼 상사의 성과 평가도 낮았다.
배울 게 없어서 오는 정체는 다르다. 이런 정체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 일을 잘 해낸다는 확신이 높다. 그 확신은 상사가 매긴 성과 평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주니어든, 시니어든 마찬가지다.
정체감을 느낀다는 건 자기 일에 그만큼 익숙해졌다는 신호였던 것이죠. 이것은 일을 충분히 몸에 익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신감의 일종이고, 그런 경향이 상사의 평가에서도 확인된 거죠.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아버지가 어린 딸에게 이런 말을 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실력은 비탈로 느는 게 아니라 계단처럼 느는 거야.
한동안 제자리에 머물다 어느 순간 한 칸 껑충 올라서고 다시 한동안 평평하다 또 한 칸 올라선다는 거예요.
우리는 흔히 성장은 우상향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체된 구간을 만나면 곧장 불안해져요.
나만 멈췄다고, 뭔가 잘못됐다고.
주식창을 보며 팔아야 하나 싶었던 것도 결국 같은 마음이었죠.
하지만 현실에서의 성장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정체도 성장의 일부고, 지금 정체됐다고 느끼는 건 이미 어느 정도까지 올라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일이 더는 새롭지 않고 제자리인 것 같고 남들만 앞서가는 것 같다면, 그건 대체로 나쁜 신호가 아닙니다. 계단의 한 칸을 다 오른 사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지금 일이 쉬워져서 멈췄다는 생각이 든다면, 잘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