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며칠 사이에 한 권의 바카라에 푹 빠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김영빈 시인의 디카시집
『세상의 모든 B에게』입니다.
바카라을 한 번 펼치면
쉽게 덮히질 않습니다.
읽는다기보다,
한 장면 앞에 오래 머물게 됩니다.
기존의 디카시집은 보통
‘제목 → 사진 → 시’의 흐름입니다.
제목이 먼저 방향을 잡아주고
그 위에 사진과 시가 얹히는 구조이지요.
그런데 이 바카라은 다릅니다.
사진 → 시 → 제목
이 순서 하나가
읽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먼저 듭니다.
“나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쓸까?”
잠깐 멈춰서 상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야 시를 읽습니다.
그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아, 나는 이렇게 봤는데… 작가는 이렇게 봤구나.’
마지막으로 제목을 보는 순간,
또 한 번 생각이 전복됩니다.
“이 장면을 이렇게 부를 수도 있구나.”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바카라을 읽는 내가 아니라
디카시를 쓰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이 바카라의 매력은, 그저 ‘좋다’는 감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꾸 들여다보며 분석하게 됩니다.
디카시 〈회양목〉을 보면,
처음에는 단순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읽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어 있습니다.
보통 벌은 쏘는 주체로 기능하고, 식물은 그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 관계가 미묘하게 흔들립니다.
이 시에서는 오히려 회양목이 ‘벌을 받은’ 존재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벌’이라는 단어도 흥미롭습니다.
단순한 insect(벌)로 읽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punishment, sin, crime 같은 의미까지 겹쳐지면서 의미의 층위가 확장됩니다.
이 중의성 속에서 쏘는 주체였던 벌의 위치는 흐려지고, 회양목이 오히려 ‘벌을 받은 주체’처럼 인식됩니다.
그 순간, 주체와 대상의 위치가 전도되며
해석의 전복이 일어납니다.
짧은 시 안에 이런 중의적인 층위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읽을수록 깊어집니다.
또 한 편, 〈세상의 모든 B에게〉를 보면
이 시집의 제목이 왜 이렇게 붙었는지도 보입니다.
풀의 그림자 속에서
어떤 형상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분명 풀의 그림자인데,
자세히 보면 A처럼 보이는 형상이 포착됩니다.
그 순간 시선은 한 번 더 이동합니다.
보이는 것은 A인데,
의미는 B로 확장됩니다.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이미지의 주체가 ‘풀’이 아니라
‘해석하는 시선’으로 이동한다는 점입니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읽어내는 순간
이미지는 또 다른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보이는 형상(A)과 읽어낸 의미(B) 사이에서
시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이 작품은 말해줍니다.
"디카시는 눈에 보이는 장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면 속에 숨어 있는
의미와 관계를 발견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그리고 〈5월 14일〉이라는 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풀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형상 속에서
숫자 ‘14’가 포착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 형상을 ‘날짜’로 읽어내는 순간
이미지 → 형상 → 의미 → 시간
이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하나의 장면이
하루의 의미로 완성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시선입니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누군가는 지나치고,
누군가는 날짜를 발견합니다.
그 차이가 곧, 시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 작품은 보여줍니다.
디카시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회양목〉, 〈세상의 모든 B에게〉, 〈5월 14일〉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시집의 핵심이 더 또렷해집니다.
주체와 대상이 전도되는 시선
보이는 것 너머를 읽어내는 감각
이미지가 의미로, 의미가 시간으로 확장되는 구조
이 모든 것이 짧은 디카시 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집은 단순히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발상의 깊이와 예술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읽힙니다.
여러 공모전 수상자의 시집답게,
기발함을 넘어
문학적인 완성도까지
안정적으로 갖추고 있습니다.
이 바카라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배우게 됩니다.
무엇을 포착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줄여야 하는지
어디에서 의미를 터뜨려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이
말이 아니라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디카시는 쓰는 기술이 아니라, 보는 힘이다.
이 바카라은 특히 세 분들께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디카시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
막막함이 있을 때, 기준이 되어주는 바카라입니다.
둘째, 자신의 디카시를 한 단계 끌어올리고 싶은 분들
내 시의 부족함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셋째, 공모전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인가’에 대한 감각을 길러줍니다.
많은 디카시집을 보아왔지만,
이 바카라처럼
읽는 순간, 쓰고 싶어지는 바카라은 드뭅니다.
그래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만난 최고의 디카시집이라고요.
좋은 바카라은 오래 남습니다.
그런데 이 바카라은
남는 것을 넘어,
내 시선을 바꿉니다.
사진 한 장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힘.
『세상의 모든 B에게』는
그 힘을 가진 바카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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