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감는 동안 기승전-결까지 가능한 이야기

by나들

샤워부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물을 틀고는 쏟아지는 물줄기 속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한 번 꾹 눌러 짠 샴푸를 손바닥에서 거품을 내고는 정수리부터 묻혀...


순간 머릿속에 이 말이 떠올랐다.

데자뷔?


데자뷔 [deja vu]
: 처음 해 보는 일이나 처음 보는 대상, 장소 따위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현상


씻기, 출근하기, 일하고 퇴근하기, 밥 먹기, 자기...처럼 끝이 없을 것 같은 일들은 매일 반복된다. 고로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데. 새삼스럽게 데자뷔를 느낀 것은 왜일까.


일상 속 저런 루틴들은 분명 반복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형체는 반복되는 듯 보여도 그 안을 채우는 내용과 생각은 매일 다르며 그러니 매번 처음이다.

'오늘은 처음인 머리 감기'에서 감지한 데자뷔는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뭐 운명이라든지 복선 따위의 드라마틱하고 그럴듯한 요소는 아닐지어다.

자조.

인지하면서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어, 데자뷔인가... (멈칫하는 잠깐이 지나고는)
그래. 매일 똑같지. 어제 겪은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그렇겠지. 모레도, 다음 주에도, 내년에도... 머리 감는 일만 그럴까. 하루하루 이런 모양으로 지나가겠지.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이만큼 자라 있는 걸 어느 순간 발견하겠지. 난 소스라치게 놀랄 거야. 언제 이렇게 컸지? 감탄과 기특함 같은 감정은 곧 나를 향하게 될 거야. 난 또 언제 이렇게 늙은 거지? 과정을 건너뛴 채 결과의 모습으로 마주하는 나이 듦은 얼마나 씁쓸하고 쓸쓸할까.


상상만으로 철렁해진 나는 서둘러 수도꼭지를 더듬어 다시 물을 틀었다.

거품을 씻어내는 물줄기의 미지근한 온도를 느끼며 새삼 어떤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다이어리 단톡방에 아침 일찍 올라온 회원들의 다이어리 기록 인증 사진이었다. 그들의 부지런한 인증 알림과 더불어 애써도 외면해 왔던 내 모습까지.





글쓰기며, SNS도, 다이어리도 그만큼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다.

중차대한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의 원인이라면 복직일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한 글쓰기부터 멈추었다. 가장 애정을 쏟았던 만큼 부담을 가졌던 것일까. 한시도 마음 떠난 적 없으면서 좀처럼 다시 열리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대체하기라도 하듯 SNS 인증은 이후에도 제법 열심히 이어갔다. 하지만 이것도 어느 때부턴가 식어갔다.

인증거리를 살펴보자. 피아노는 레슨을 그만둔 게 맞다. 선생님 저 피테기가 왔어요... 하면서 그만둔 게 몇 달 전이다. 바카라은 계속 읽고 있지만 필사는 멈추었다. 다행히 운동은 여전히 꾸준히, 되려 더 열심히 하는 유일한 '거리'다. 살기 위해... 다만 대체로 인증에 대한 열의가 식은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부쩍 침침해지는 눈과 통증이 심해진 목디스크를 '요인'이라 할지 '핑계'라 할지 나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이어리는 마지막 보루다. 하모. 그래도 십 대부터 함께한 역사와 의리가 있는데! 하면서 오랜만에 펼친 나의 다이어리에는... 4월 6일이 마지막.

되게 의리 있는 인간아.




남은 거품을 헹구다가 문득 작은 깨달음이 왔다.

글쓰기든, SNS 인증이든, 다이어리든 모두 '기록'이구나. (그렇다. 유레카를 외치기엔 다소 새삼스럽다)


나는 이렇게나 기록을 좋아했구나.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나 모든 걸 놓고 있구나.

기록하는 사람은 일상과 순간의 소중함을 알고 아끼는 사람이라지 않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이라 해도 그 안의 순간을 지루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 씻기, 출근하기, 일하고 퇴근하기, 밥 먹기, 자기... 같은 일도, 반복된다고 같은 일이 아님을 안다.


씻을 때도 매일의 컨디션과 그날의 기온에 따라 물 온도를 미세하게 다르게 조절하게 된다. 출근하는 길도 어떤 날은 뻥뻥 뚫리고 어떤 날은 여기저기 도로 공사나 교통사고로 정체되곤 한다. 아무 일도 없는데 나 빼고 다 어디 놀러 가나 심술이 나게 꽉 막힐 때도 있다. 일할 때도 그렇다. 매일 같은 업무를 처리하는 것 같지만 단 하나도 똑같지 않다. 하늘 아래 같은 민원인 없고 업무는 다채롭기 그지없으니 대관절 매너리즘이 뭔가 싶다. 내 팀이 아니면 하다 못해 옆 팀들에서 쇼킹한(!) 일들이 쉴 새 없이 터진다. 매일 같은 시간에 점심을 먹지만 메뉴도 미세하게 다르고 도시락 멤버들과 나누는 수다 소재도 화수분처럼 새로이 솟는다. 퇴근하는 길에 보이는 하늘 풍경도 매일 변하며 차에서 듣는 라디오의 선곡도 그렇다.


엊그제 자기 전, 아이들과 옹기종기 모며 휴대폰 속 자료들을 함께 들여다본 일이 있었다. 나의 육아기록 혹은 아이들의 성장기록을 거꾸로 거슬러가며 우리는 울고 웃었다. 아니구나. 훌쩍거린 건 나뿐이었네. 나 개인의 기록은 더했다. 당시 그것을 보며 생각한 것, 그때 위로받은 음악, 고마웠던 혹은 타산지석을 가르쳐준 사람들, 깔깔거린 대화, 속상했던 사건들.

기록 속 과거들은 반복되는 일상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다르기에 기록했고, 기록함으로써 빛이 났다.




오늘도 다시 어제네, 내일도 오늘이겠지 같은 생각이 든 것은, 그토록 사랑한 기록의 활동들을 시나브로 놓고 있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뜨끔해졌다. 나를 방치한 미안함마저 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나를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다. 예전만큼 열렬히 임하지 못하는 것을 자바카라하지는 말자고 조금 내려놓고도 싶다. 그래도, 별로인 점 투성이인 나에게도 스스로 썩 괜찮게 여기는 이런 면이 있다면 이것만큼은 내가 조금 노력해서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고 나오며 나는 조금 조급해졌다.

오랜만에 든 건설적인 생각이 훌쩍 사라지기 전에 빨리 남겨야 하니까 말이다. 요즘 어찌나 순식간에 생각이 휘발되는지?

아니 그러고 보니 깜빡증의 해결바카라도 기록하는 것뿐이네. 적어야 기억한다.

결론 이거 뭐지. 기승전-'다시 기록'.

이런 답정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