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코 한 코 뜨개질하듯

[리뷰] 유재은 작가 <무용해도 좋은>을 읽고

byCha향기

유재은 작가의 바카라 <무용해도 좋은>(2025년 10월 출간)을 읽고 나니, 칙칙한 일상에도 나름의 색깔을 입히는 습관을 배우게 됐다. 투명한 것조차 새로운 빛깔로 바라보게 하고, 지나온 삶은 빛 스펙트럼이 되었다는 걸 새삼 알았다. 그래서 "빛으로 헤아린 하루의 풍경 / 서툰 감정들이 빛이 되어 말을 건다"라는 부제를 한 잔의 잎차처럼 머금었다.


작가는 문장의 향기를 헤아리며 '읽고 쓰는 삶'을 살았다. 26년간 글쓰기를 지도하고 있다. <문학의 봄> 신인상 수상을 통해 동화 작가로 등단했고, <매일경제>에 글을 연재했으며 저서로는 <종이 바카라의 위로!>가 있다. 깊어지는 생의 계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용해도 좋은' 순간들을 발견하며 그 묵묵한 길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바카라을 출간했다고 한다.

▲다양한 빛깔로 된 바카라 표지 ⓒ 바카라과나무

바카라의 장마다 다양한 빛깔이 소개된다. 바카라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빛이 많기도 하다. 가림빛, 거먕빛, 검부잿빛, 발간빛, 반물빛, 제빛, 갈빛, 꼭두서닛빛, 가짓빛, 갈맷빛, 모싯빛, 약댓빛, 감은빛, 꽈릿빛, 날빛, 먼뎃불빛, 이슬빛, 이사빛, 대춧빛, 무명빛 등은 처음 접하는 색이다. 실제로 이런 색깔이 있는지? 아니면 작가가 섬세한 시선으로 살려낸 빛인지 궁금했다. 아무튼 우리말로 명명된 고유한 색상 이름이 어지간히 예쁘고 정겹다.


게다가 그 빛깔들과 매칭된 글 제목이 조탁된 시어 같았다. 예를 들면, '가림빛'은 "볕뉘의 순간", '거먕빛'은 "불안을 살아내다", '반물빛'은 "그날이 오늘이라면" 등이다.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글 제목 하나가 한 편의 시를 압축해 놓은 듯했다. 작가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글 한 편을 쓰면서 얼마나 깊이 생각했는지 가늠이 됐다. 글을 한 코 한 코 뜨개질 하듯 매만졌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 쓸모없다고 여겼던 시간조차 결국은 삶을 지탱하는 빛으로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세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과 개인적 기억을 우리말의 아름다운 색채어에 담아냈다. 가림빛, 연보랏빛, 무지갯빛 등 잊혀가는 고유한 색이름을 통해 불안과 슬픔, 기다림, 사랑과 같은 감정을 기록하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바카라과나무 출판사)


바카라 서두에서 작가의 출간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열심히 살아왔던 시간,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아픔까지도 무용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 이면에는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제는 모든 것이 무용해도 괜찮다며 삶을 관조하고 있다.


살아감에 있어 무용한 시간은 없습니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불안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살아보니 모든 순간이 가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상처받은 관계와 수많은 좌절의 시간도 돌아보니 무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름의 빛깔로 스며들어 더 깊은 생의 걸음을 걷게 했어요. (프롤로그 중에서 )


작가는 고등학생일 때 한 아이를 만났던 일을 쉽사리 잊지 못한다. 달랑 이름 하나만 주고받으며 헤어져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아이를 잊지 않으려고 그날 오후에 느낀 감상을 동화로 남겨두었다. 아이의 마음과 가족을 상상해 보며 작가가 스무 살에 썼던 「하늘바라기」. 그 단편 동화는 20년이 지난 후에 빛을 보며 등단의 길이 열린다. -130p


걷다가 멈추고 싶을 때가 찾아오면 또 다른 샛길 여행을 할 거라고 작가는 말한다. 왜냐하면 여행에서 마주한 샛길이 찬탄할 만한 풍경을 선물해 주는 것처럼, 삶의 샛길은 인생을 아름답게 안아주리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봄 같은 어린아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웃게 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곁에 있는 아이 엄마의 얼굴에도 눈길이 머물러요. 젊은 엄마는 예쁘니까요. 멋스럽게 꾸미지 않아도 맨얼굴에 부스스한 모습조차 빛이 납니다. 그 시절의 내가 눈부심을 알아보지 못했듯 다시 십 년이 흐르면 지금의 내 나이도 곱게 여겨질까요."(‘꼭두서니빛’ 중에서)


이 부분에서 격하게 공감됐다. 증명사진이나 인물 사진을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더러는 어머니 사진을 보는 듯한 착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하며 그 사진을 깊이 넣어둔다. 그런데 십 년 정도 지난 후에 우연히 그 사진을 다시 보면 '그래도 그때는 볼 만했네'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은 저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스치고 마음마저 헤집으면서 흐른다.


잠들지 않는 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나, 아마 일중독일 것 같은 나에게 무용해도 좋으니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토닥여 주는 작가의 숨결이 닿았다. 삶의 템포를 늦추며 행동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게 해 준 바카라이었다. 작가의 글 호흡은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수채화처럼, 클래식 음악처럼 담담하고 차분했다. 숨 가빴던 내 일상에 숨 고르기를 하도록 도와주었다.


바쁜 일상에 허덕이는 분들이
차 한잔 마시는 기분으로 읽으면
좋은 바카라이라고 여겨진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24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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